헤어진 연인의 재회

진, 그리고 사랑

by 서윤

드라이 진 1과 1/2온스와 오렌지 주스 1과 1/3온스, 그리고 설탕 1 티스푼을 셰이커에 넣고 흔든 뒤 칵테일글라스에 따른다. 샛노란 빛을 띠는 이 칵테일은 '오렌지 블러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웨딩드레스에 오렌지 꽃을 장식하는 미국 전통에 따라 결혼 피로연의 식전주로도 사용된다. 그리고 같은 이유로 상대에게 사랑을 표현하거나 청혼을 하는 용도로 이 칵테일을 주문하기도 한다. 요약하자면, 사랑과 풍요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겠다.


바이올렛 리큐어의 아름다운 보랏빛이 감도는 이 칵테일은 '블루 문'이라고 불린다. 드라이 진 2온스, 바이올렛 리큐르 1온스, 레몬주스 1/4온스, 물 1/2온스를 얼음과 함께 셰이커에 넣어 셰이크하고 칵테일글라스에 담으면 밤안개 속에서 빛나는 달빛과 같은 이미지의 칵테일을 맞이할 수 있다. 하지만 아름다운 비주얼과는 다르게 블루 문 칵테일은 '불가능'이라는 부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바에서 혼자 칵테일을 마시고 있는 여성에게 작업을 걸다 여성이 블루 문을 주문하면 물러서는 것이 예의라고 하니. 불가능한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 바로 이 블루문 칵테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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칵테일 오렌지 블러썸(좌)과 블루문(우)



외견상 노란색과 보라색의 대비를 이루면서도 진 베이스를 공유하고 있는 두 칵테일. 겉으로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도 같은 베이스가 들어간다는 면을 보면 만남과 이별, 이별과 만남은 결국 궤를 같이한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만 같이 느껴진다. 사랑이 불꽃같이 피어났다가 서서히 식어가는 것처럼 식어가던 사랑도 힘을 받으면 결국 다시 불길이 피어오른다.


오늘 찾아온 남녀 손님의 분위기는 처음부터 심상치 않았다. 남자는 여자 앞에서 자신 있는 모습을 보여주려 애쓰면서도 초조하고 긴장된 모습을 감추지 못했고 여자는 남자 앞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을 지었다. 서로 간의 일상적이고 관심 어린 이야기가 어느 정도 이어졌다. 하지만 두 남녀의 대화는 점차 소강상태에 접어들었고 계속 머뭇거리던 남자가 마침내 무거운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 좋았었잖아. 그치?



사뭇 진지한 표정의 그는 지금까지의 자신감 있는 모습과는 대조되게 무척이나 조심스러워 보였다. 여자는 긍정도, 그렇다고 해서 부정도 아닌 의미심장한 표정과 손 제스처를 취했고 그런 모습을 본 남자의 목은 점차 타들어 갔다. 바는 마치 둘만 있는 것마냥 조용해졌다.



그래. 딱 일주일 줄게. 일주일 안에 그 남자 다 정리해.



남자는 크게 작심하고 말했다. 하지만 이때도 여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남자 손님의 주문대로 봄베이 사파이어 진을 베이스로 하여 토닉 워터를 넣고 진토닉을 만들었다. 맑고 투명한, 하지만 겉보기와 달리 두송자 열매의 강한 향이 잔 주위에 강렬하게 머무는 칵테일 두 잔을 손님의 앞에 내놓자 여자 손님이 천천히 잔을 들어 입가에 가져다 댔다. 남자 손님은 슬픈 눈으로 여자가 목 뒤로 술을 넘기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우리가 다시 만난다고 좋아질까?



텍사스 대학교와 연세대학교 등 4개 대학교에서 연구한 결과에 따르면 60% 이상이 헤어졌다가 똑같은 사람과 다시 만난 경험이 있었다. 그중에서 심지어 75%는 똑같은 사람과 두 번 이상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기까지 했다. 생각하는 것보다 우리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면 좋아질 수 있을까? 위의 경험이 있는 대학생 274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 따르면 다시 만난 이유 중 47%로 가장 높은 비중은 차지한 것은 '아직 남아있는 감정'때문이라고 한다. 그때는 힘들어서 헤어졌지만 막상 헤어지고 보니 자신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상대방을 좋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는 커플을 향해 "어차피 같은 이유로 또 헤어지게 되어있어"라며 안 좋은 시선을 보내지만 아직 서로의 감정이 남아있다면 다시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인 것 같다.


남자 손님은 여자 손님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못했다에 더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상대가 칵테일 마시는 모습을 지켜보던 남자는 상대에게서 시선을 조용히 거두고 멍하니 앞만 바라본 채 진 토닉으로 입 안을 적셨다. 남녀 손님 모두에게서 진의 강한 향이 머물렀다.



네 생각 많이 나더라.



남자는 여자 쪽으로 고개를 돌렸으나 차마 눈을 마주 보지 못한 상태로 대답했다. 여자는 과연 남자의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였을까? 둘의 대화는 새벽이 되도록 이어졌다.


선홍빛의 체리브랜디와 드라이 베르무트, 그리고 이전과 마찬가지로 드라이 진을 믹싱 글라스에 담아 얼음을 넣고 스터 한다. 적당히 섞였을 때 스트레이너를 위에 끼우고 칵테일글라스에 담으면 마티니에 체리브랜디가 들어간, 달콤한 향이 풍기는 '키스 인 더 다크'가 만들어진다. 이름과 같이 로맨틱한 밤에 어울리는 칵테일이다.



20170301_192502.jpg 키스 인 더 다크 칵테일



자주색의 루비 보석을 보는 듯한, 우아한 비주얼의 칵테일이지만 드라이 진의 강렬함으로 인해 그 맛은 보기보다 가볍지 않다. 하지만 진의 쓴 맛을 볼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면서도 체리브랜디의 달콤함에 끌려 자꾸만 손이 가게 된다. 마치 우리네 사랑과 같이 말이다. 다시 사랑을 시작하면 비슷한 상처를 받을 것이란 사실을 알면서도 우리는 또다시 사랑을 꿈꾼다.


상처 받은 두 남녀도 그랬을 것이다. 잃어버린 사랑을 되찾기 위해 창피함을 무릎 쓴 남자는 그 과정이 쓸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의 사랑을 잊지 못해 자리를 만들었고 남자의 노력에 반응한 여자는 사랑의 끝이 더욱 쓸 수도 있다는 사실을 예감하면서도 그 달콤함을 잊지 못해 잘못된 만남을 계속한다. 그렇게 그 둘은 여기 바 앞에 앉았다.


과거의 커플은 다시 사랑하게 될 수 있을까? 진의 강렬한 향만큼이나 사랑의 강렬한 여운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잔잔히 남아 행복했던 그 시절을 계속 추억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그때의 그 추억을 머릿속에 간직하며 현재와 계속 이어지는 접점으로 만들기 위해 애쓰고 있다. 너와 나, 그리고 우리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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