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적인 만남으로 가득찬

989,727 분의 1. 어쩌면 그보다 더 기적적일지 모를.

by 서윤

소설가 알랭 드 보통은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를 통해서 남녀 사이의 운명적 만남에 대해 이야기했다. 훗날 연인이 될 두 남녀 주인공이 우연히 비행기 옆좌석에서 만나게 된 수학적 확률은 1년 365일 중 그 날 여행을 출발할 확률, 하루 중 수많은 출국 시간대에서 그 시간의 항공편을 선택할 확률, 여객기 내 수백 개의 좌석 중 딱 붙어있는 두 좌석을 선택할 확률, 그리고 두 남녀가 서로 호감을 느낄 확률을 모두 곱한 것이다. 소설 내 남자 주인공이 계산한 정확한 수치는 자그마치 「989,727 분의 1」. 남녀 간의 운명적 만남이라는 비과학적인 현상을 수학적으로 분석하면 이렇게 천문학적인 확률의 결과가 나온다.


서로 사랑에 빠지는 남녀 간의 우연한 만남만큼이나 우리가 매일 같이 만나는 모든 사람들과의 인연도 만만치 않게 운명적인 확률로 가득 차 있다. 매일 출퇴근 시간마다 대중교통에서 만나는 사람들, 공원 벤치에서 우연히 옆자리에 앉은 사람, 마트에서 물건을 집는 과정에서 동시에 같은 물건을 잡는 우연 등 세상의 모든 만남, 인연, 관계가 하나하나 따지고 보면 놀라울 정도로 기적적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리 삶을 둘러싸고 있는 평범한 하루하루가 작디작은 기적들이 쌓여서 만들어진 오늘인 것이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은 바로 이러한 운명론적인 관점을 바탕으로 나왔을 것임이 분명하다. 그냥 스쳐 지나갈 수 있는 가벼운 인연일지라도 가벼운 만남 하나하나에 감사함을 가지고 살아가자. 이와 같은 마음가짐을 가슴속에 품으며 삶에 감사함을 느끼라는 선조들의 조언이 담겨있는 말인 것이다.


견습바텐더로서의 삶을 시작하면서 처음 가졌던 마음가짐도 그러했다. 나에게 있어서는 오늘 하루가 생계를 위한 평범한 하루에 불과하겠지만 바를 찾는 손님들에게는 평생 기억에 남을 소중한 하루일지도 모른다. 손님이 가지게 될 소중한 추억을 생각하며 내가 제공할 수 있는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하자. 나와 손님의 운명적인 인연은 바로 거기서부터 시작될테니. 매일매일의 출근에 내가 최선을 다하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었다.


바에 손님이 들어오고 손님과 이야기 나누고 그들과 친분을 쌓아가는 일상이 꽤나 재미있었다. 나의 서비스에 만족하고 나를 보기 위해 다시 이곳을 찾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크나큰 보람을 느꼈다. 하지만 바텐더로서 일하는 날이 길어지고 만나는 손님들이 늘어날수록 점점 손님들을 기억하는 것이 어려워졌다. 일류 바텐더는 한 번 밖에 만나지 않은 손님일지라도 그의 외모, 취향, 주문한 칵테일을 모두 기억한다던데 안타깝게도 나에게 그런 재능은 없었다.


%C1%A6%C1%D6_%BC%BC%C8%AD_%C4%AB%C6%E4-9.jpg


바 문을 열고 10명 이상의 단체 손님이 들어왔다. 그들 중에서 일행을 이끄는 듯한 남자 손님 하나가 바를 지키고 있는 나에게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더니 다짜고짜 물었다.



S는 어디 있어요?



매니저 형과 친분이 있는 사이인 듯했다. 사장님의 호출로 인해 S형은 1호점에서 일을 보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2호점에서 일하는 우리는 우선 손님들을 테이블에 앉힌 다음 1호점에 연락 해 매니저 형을 급하게 불렀다. 5분 정도가 지나자 마침내 S 형이 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냈다.



S야! 지금까지 어디 있었던 거야? 내가 얼마나 찾았는데.



바텐더가 오기만을 기다리던 손님이 매니저형이 들어오자마자 문 쪽으로 달려 나가 격하게 반기며 말했다. 매니저형 또한 오랜만에 본 손님이라 반가웠는지 목소리 톤이 올라간 상태로 그들과 오랜 회포를 풀었다.


바는 이내 어수선해졌다. 밀려드는 칵테일 주문 때문에 나의 손은 조금도 쉴 틈이 없었고 식기 세척대는 곧 칵테일 기구와 잔들로 가득 찼다. 본래 메뉴판에는 없지만 특별한 손님을 위한 메뉴 외 칵테일 주문은 덤. 내가 정신없이 손을 놀리는 동안 매니저형은 손님들과 정신없이 입을 놀렸고 그 날 하루는 매니저 형의 단체 손님들을 서비스하는데 모든 힘을 쏟아야 했다.


thebar-pina-colada-capt-morgan-spiced-rum-1425x950069A0000001Kj8EIAS.jpg


단체 손님들이 떠난 바는 치열한 전투가 종료된 격전지와 같았다. 바텐더들 밖에 남지 않은 바는 아까의 소란이 그리워질 만큼 무섭게 고요했고 해야 할 뒷정리가 산더미 같이 쌓여있는 것을 보며 우리는 이미 지쳐있었다. 하지만 힘들다고 해서 뭘 어쩌랴. 나는 힘든 몸을 이끌며 타월을 빨아 카운터 바를 닦았다.


힘들게 바를 정리하면서도 나는 매니저 형의 손님 관리 능력에 감탄했다. 바를 찾아온 손님이 다시금 나를 만나기 위해 찾아오게 만드는 것. 어쩌면 그것이 바텐더가 지녀야 할 중요한 능력 중에 하나일지도 몰랐다. 옆에서 같이 정리를 도와주고 있는 매니저 형을 보며 나는 천천히 입을 뗐다.


"그런데 형, 저 손님들은 어쩌다 알게 된 손님들이에요?"

"몰라."

"네?"



모르지. 누군지 모르겠어 나도.



순간 뒤통수를 크게 얻어맞은 듯했다. 생각해보니 그랬다. 나야 이제 막 일을 시작한 견습에 불과하지만 매니저 형에게 있어서는 지금까지 스쳐간 손님이 적어도 수천이 넘을 텐데 그 손님들을 모두 기억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일류 바텐더는 한 번 본 손님이라도 평생 기억한다고 했으니 기억하지 못하는 손님이라도 마치 어제 본 손님인 양 어색하지 않고 반갑게 맞을 줄 아는 바텐더는 이류쯤 되려나. 매니저 형의 능숙한 손님 응대가 빛을 발하는 때였다.


「989,727분의 1」. 어쩌면 그보다 더 극적인 확률로 만났을지 모르는 바텐더와 손님은 운명적인 인연을 만들어가지만 한 바텐더가 바를 찾는 모든 손님에게 동등한 관심과 추억을 선사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바텐더에게 너무 서운해하지는 않아 주었으면 좋겠다. 언제, 얼마 만에, 몇 번을 찾아오든 바텐더는 항상 손님에게 최선의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노력하니까. 당신의 오늘은 바텐더에게도 마찬가지로 당신과의 소중한 오늘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여자친구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