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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 작 하는 그녀 Jan 29. 2021

책장 속, 시간 여행

짧은 수작 에세이 3

저의 집 책장에서 뜻밖의 시간 여행을 하게 된 이야기입니다.


거실을 서재로 꾸미는 것이 오래전부터 저의 작은 소망이었습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기회가 오지 않았습니다.

결혼 전에는 작은 평수의 집에서 자취를 했고,

결혼 후에는 아이를 낳으면서 거실이 아이의 장난감으로 가득 찼죠.


거실을 아이 놀이터가 아닌 온 가족의 서재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지금 집에 이사 오면서 거실 한쪽 벽에

맞춤형 책장을 만들어 넣고

몇 년 동안 모아 온 여러 종류의 책을 그 공간에 빼곡히 채웠습니다.


저의 손 때가 묻은 책들은 그렇게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사 온 지 2년이 다 되어가지만,

이삿짐센터의 흔적 그대로 칸칸에 덩그러니 놓여있었습니다.


책을 종류별로 분류해야겠다는 생각에

이따금씩 책 제목만 보고 재배치하는 정도였죠.


신간 서적들을 사서 읽고, 남아있는 공간에 끼워넣기 바빴습니다.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진 요즘, 며칠 전엔

"내가 예전에 좋아했던 책이 뭐였지?"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자기 계발 서적, 경영 서적만 읽다 보니 나 자신이 자꾸 건조해지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그때 문득 머리에 스친 책은 김훈의 <자전거 여행>.

"이 책을 산 지 십 년이 넘었는데, 여기에 있을까?       

몇 번의 이사를 거쳐 나를 따라왔을까?"


방에서 거실로, 거실 책장에서 눈으로 더듬거릴 때까지 삼분 남짓 걸렸을까요.

설렘과 불안함이 아지랑이처럼

희미하게 피어오르는 듯싶더니

그 짧은 순간, 이 두 감정이 섞여

어느새 마음속을 꽉 채우더군요.


"하... 이럴 수가..."

<자전거 여행>을 거실 책장에서

찾아냈을 때의 묘한 기쁨!

어릴 적 친구를 오랜만에 만난 것처럼 반갑고,

여러 차례 이사 풍파에도 내 곁에 있어준 동반자처럼 믿음직스러웠습니다.



있는 듯 없는 듯 자신의 존재를 생색내지 않고

그동안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더군요.

그동안 많이 외로웠을 것 같더군요.


이내 마음 한편이 무거워졌습니다.

뽀얗게 내려앉은 먼지의 무게만큼,

누렇게 색이 바랜 시간의 흔적만큼,

나 자신을 들여다보는 마음에도

먼지가 쌓여 있었나 봅니다.

나 자신도 내 마음속에 생색내지 않고
나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나는 나 자신을 마주하지 않고
자꾸만 사회 속의 나만, 가족 속의 나만, 그게 진짜 나인 줄 알고
나 자신이 제 자리에 변함없이 그렇게 있어주는데도
알아봐 주지를 않았던 겁니다.


그렇게 저는 나 자신에게 말을 거는 시간 여행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십 년 훌쩍 넘게 나를 따라다닌 책, 나 자신을 좀 들여다보라고 책장 속에서 나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조용하지만 끈질기게



대학생 시절 카피라이터가 꿈이었던 저는

광고연구원이라는 곳에서 카피라이팅 실습수업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광고계의 유명 카피라이터이자 수업 선생님에게서 추천받은 책이

김훈 작가님의 <자전거 여행>이었습니다.


'치열한 사고와 말 고르기를 거쳐 나온 고승의 사리'라고 평가될 정도로

한 땀 한 땀 눌러쓴 흔적이 돋보이는 힘 있는 문체에 적잖이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이 책의 초판 1쇄가 2000년,

제가 가지고 있는 책이 22쇄 2003년 버전이니

2021년이 된 지금까지 제 곁을 지켜준 셈입니다.


제가 대학교를 졸업하고, 꿈에 그리던 광고회사에서 카피라이터로 일하다가

대기업 광고 담당으로 자리를 옮기고,

결혼해서 지금까지

일곱 번 정도의 이사할 때마다 저 몰래 저를 따라다녔다는 사실도 지금에야 깨달았습니다.


이 책을 꺼내 다시 읽는 순간

그 시절로 시간 여행을 떠나는 기분이 들더군요.


요즘 경영 서적에서 '회복 탄력성' 키워드가 핫하다지만

저에겐 '회귀 탄력성'이 생겼나 봅니디.


대기업의 울타리 안에서 직장인이라는

직업 아닌 직업을 가지고

이 곳에서 인정받고 승진하는 게 다인 줄 아는,

샐러리맨의 쳇바퀴 속에서

마약 같은 월급의 달콤함을 먹고 살기에

헤어나지 못하며 나를 잃어버려도 합리화시킬 줄 아는, 

그저 그런 사람.


보기엔 예쁘고 쫓아다니고 싶지만

살짝 닿기만 해도 금방 무너져버리는 비누방울처럼

내 인생을 둥둥 떠다니는 느낌.


글 쓰는 것이 좋아서 창작하는 것이 좋아서 시작한 카피라이터의 감성이

이제는 상사를 위한 보고서만 쓰는데 익숙해진

영혼없는 글쟁이가 되어있는 건 아닌지,

내가 향해 가야할 인생의 지향점이 어디인지,


그 때 그 시절 나 자신을 꿈꾸던 시간 여행을

더 늦기 전에 시작해보려 합니다.



여러분도 많이 응원해주실 거죠?

저와 비슷한 고민을 가진 분들이 있다면 함께 고민을 나누고

저를 찾아가는 과정이 여러분에게도 힘이 되기를 바랍니다.

글을 꾹꾹 눌러쓰며 길을 찾아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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