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점의 여백, 소외된 사고의 흔적들

사고를 관찰하는 사람의 자리

by 수한가로

나는 누군가에게 체계적으로 수학을 배워본 적이 없다(학교에서 선생님께서는 열심히 하셨다. 내 못남이지). 아니 정확하게는 그렇게 배울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환경에서 컸다. 학원 문턱을 넘지 않았던 학창 시절, 나의 공부는 앞뒤를 가리지 않고 필요한 것을 찾아 헤매는 불규칙한 탐색에 가까웠다. 돌이켜보면 그 무질서한 시간은 지식을 스스로 조직화하고, 모르는 것과 알고 싶은 것 사이의 간극을 메워가는 과정이였다.


그 덕분일까. 나는 학생들이 어느 지점에서 벽을 느끼는지, 그 벽을 넘기 위해 어떤 단서가 필요한지를 조금 더 예민하게 알아차리게 되었다. 타인의 마음속을 완전히 들여다볼 수는 없으나, 그들이 멈춰 선 자리의 고단함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런 시선은 자연스럽게 채점하는 상황에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대형 학원의 채점 테이블은 학생의 사고가 가장 날것으로 남겨지는 장소다. 하지만 현실에서의 채점은 사고의 기록이 아니라, 정해진 틀에 맞지 않는 것을 빠르게 쳐내는 배제의 작업에 가깝다. 쏟아지는 시험지 속에서 논리적 정합성이 뚜렷한 풀이는 운 좋게 발견되기도 하지만, 정돈되지 않은 거친 사유들은 대개 '헛소리'로 취급되어 무심히 넘겨진다.


정답과 오답 사이의 여백에는 누구나 빠질 수 있는 망설임과 오개념이 가득하다. 그러나 효율이 지배하는 채점의 세계에서 이러한 흔적들은 존중받지 못한다. 정답이라는 좁은 문을 통과하지 못한 모든 흐름은 '오답'이라는 단어 하나로 증발해버린다.


정답의 입장에선 단지 틀린 풀이일 뿐이지만, 사유의 관점에서 그것은 정답을 향해 뻗어 나간 가장 치열한 사고의 기록이다.

사실 그 망설임의 순간에 누군가 곁에서 사고의 동행자가 되어주었다면, 아이는 스스로 그 늪에서 빠져나와 정답의 경로를 설계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사고가 기록되지 못하고 단절되는 그 무심한 정리의 과정 속에서, 한 존재의 치열했던 사유가 소외되는 것에 깊은 불편함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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