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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거 Jang Aug 26. 2015

01. 초일류 신입



1.
'드르르륵...'
캐리어 끄는 소리가 골목을 울린다. 아직은 뻣뻣한 갈색 구두가 유난히 또그닥 거린다. 지난주 아울렛에서 건진 검정 정장 코트 위로 눈발이 달라붙는다. 나는,

누가 봐도 신입사원이다 자랑하듯 빳빳하게 차려입고 집을 나선다.  
아직 어두운 새벽의 골목길.

매일 걷던 그 길이 이전까지와는
전혀 다르게 보인다.

평범한 나의 인생이, 누구나 인정하는 대기업에 입사했다는 사실 하나로 마치 어떤 후광을 입은 듯 특별하게 느껴진다.

새벽 6시.

전철에는 의외로 사람이 많다. 손등이 거친 아저씨들과 축 늘어진 표정의 아주머니들, 그리고 쪼그려 앉아 단어를 외우는 수험생들 뿐이다. 지난 이십칠 년간 퍼질러 자던 이 시간에도 누군가는 치열하게 살고 있었구나.

객실 내 히터에 나른한 눈이 감긴다. 잠이 깨자 어느새 신입사원 집결지, 안국역이다.
'안국(安國).' 나라를 편안히 하다.
입사 첫 날에 맞닥뜨리는 이 단어가 무슨 운명처럼 다가온다. 문득 예전에 쓴 자기소개서가 떠올랐다.
'오늘날 한 국가의 기업의 수는 군함의 수보다 국력을 가늠하는 잣대로써 보편타당성이 훨씬 크다.'

기업의 역사, 존 미클스웨이트

취준생 시절 '지원동기 및 포부'란에 써먹었던 구절이다.
'글로벌 최고 기업에 입사하여 국가 경제와 사회 발전에 이바지하는 핵심 인재가 되겠습니다.' 정도로 요약할 수 있는, 진심 반 허풍 반의 내용이었다. 당시 대학생들의 자기소개는 늘 그런 식이었다. 나 역시 순진한 경영대생으로서 현대 경제의 선봉에 선 기업에서 무엇을 배울지 기대감을 나름대로 품고 있었다.




2.
"장수하는 삼성을 만들겠습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을 해 보라는 임원 면접관의 말에 나는 준비해 온 멘트를 날렸다. 면접관들이 피식 웃는 것 같았다. 이런 전근대적인 조크이자 포부가 먹힌 걸까. 나는 며칠 뒤 합격통보를 받았다.

모든 취준생들처럼 영혼의 밑바닥까지 탈탈 긁어모아 쓴 1,300자 자기소개서 한 장을 슬쩍 훑는 시간 1분.
현대 심리학과 인사관리의 결정체(?)인

SSAT로 인성과 적성을 체계적(?)으로 검증하는 시간 3시간 30분.
그리고 강남역 어느 10평짜리 회의실에서 치러진 인성면접 12분, 집단토론 25분 및

PT 발표 7분을 포함한 총 면접시간 44분.
이 모든 걸 더한 도합 4시간 15분이 어쩌면 나의 합격을 판단하기 위해 회사가 투입한 시간의 전부일지도 모른다. 나 역시 꿀단지 같은 멘트로 채워진 채용설명회나 극찬일색의 언론보도와 같은 지극히 제한된 정보만으로 회사를 접했는지도 모른다. 마치 첫 만남에 덜컥 결혼하기로 결정한 남녀처럼.

한쪽은 너무 바빴고 또 한쪽은 너무 서툴렀다.

물론 2박 3일 합숙 면접에 몇 달 내내 7차 인터뷰까지 하는 다른 회사들이라고 늘상 완벽한 허니문을 즐기는 것은 아니었지만.  

거대화된 현대 기업의 채용을 고찰하기에는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생존의 명제가 너무 절대적이었다. 그것은 오직 취업, 닥치고 취업이었다.

나 역시 이 길이 정말 맞는지 다른 길에 대한 아쉬움도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주위 사람들의 축하와 인정이 쇄도하자 마치 이 길이 아주 오래전부터 정해진 운명인 것처럼 아주 빠른 속도로 기정사실화해 버렸다. 일부 선배들이 이씨 가문의 노예가 되는 길일뿐이다, 기계처럼 야근만 하다 버려질 것이다 겁을 주었지만, 당시 내 귀에 들어올 리 만무했다. 그저 누군가

"어디 취직했어?"

라고 물어볼 때, 기다렸다는 듯 당당하게 대답할 수 있다는 자부심만이 당시 나를 감싸는 전부였다.


3.
졸린 눈을 비비며 안국역을 나오니 눈발이 더 거세졌다. 나와 비슷하게 차려입은 청춘들이 캐리어를 끌고 걸어가고 있었다. 난 그들을 따라가며 내가 가는 이 길이 틀리지 않았음에 안도했다. 그때는 알지 못했다. 이미 그때부터 남들만 따라가며 눈치만 보는 삶이 시작되고 있었다는 것을.

그렇게 어느 전시관 홀에 들어가니 왁자지껄 시끄러운 소리가 나를 압도했다. 이백 명은 족히 넘을 것 같은 신입사원들이 모여 서로 아는지 모르는지 떠들고 있었다. 설렘, 기대감, 흥분, 자부심, 그리고 약간의 두려움. 모두가 비슷한 정장에 비슷한 표정들로 이 치열한 취업 전쟁의 첫 승리감을 한껏 만끽하고 있었다.

"벽에 붙은 표에서 본인 이름을 확인하고 해당 버스로 승차하면 됩니다!"
늘 그렇듯 사람들은 각자 알아서 버스를 찾아갔다. 나는 스무 살의 신입생 OT처럼 새삼 들뜨면서도 외로운 기분을 느꼈다. 동기들의 어깨 너머로 곁눈질하며 벽에 붙은 종이에서 내 자리를 찾았다. 구석 밑 내 이름을 발견하니 그제야 안심이 되었다.  

비몽사몽 버스를 잡아탔다. 또 다시 눈이 감긴다.  
제대하자마자 인턴을 알아본다고 동분서주하던 어느 여름 날,

모의 SSAT를 본다고 소개팅도 취소하고 강의실 빈 자리를 헤집고 다니던 토요일,

신촌 토즈에서 하루 종일 면접 스터디로 불살랐던 불금들,

삼성 관련 뉴스 수백 개를 스크랩하며 밤새 불안감에 잠 못 이루던 밤들이,

그렇게 아등바등 취업을 준비하던 그 시절들이 스쳐 지나간다.

가치, 비전, 성공, 초일류... 실체도 모르는 이런 단어들이 남발되는 시대.

나는 정말 내 '자소설'처럼 거창한 '안민보국(安民輔國)'의 꿈을 위해 살아왔을까. 그저 대기업 입사를 통해  '안국(安國)'은커녕 내 한 몸이라도 건사 - '안신'(安身)' - 한다면 다행이 아닐는지. 회사도 취준생도 서로 알면서도 속아주는 게임을 해 왔던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다 스르륵 잠이 들었다.    



동이 터오는 서울의 새벽.

연수원으로 향하는 경부고속도로의 눈발을 뚫고, 그렇게 초일류 기업의 신입사원들을 태운 버스는 매섭게 달리고 있었다.  





<참고서적>

기업의 역사, 존 미클스웨이트, 유경찬 역, 을유문화사,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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