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수고했다."
행사가 끝나고 부장님이 말했다. 부장님의 그런 표정은 처음이었다. 평소에는 늘 시크하던 부장님의 표정이, 오늘만은 대견하고 또 안쓰러운듯 큰 일을 잘 해 주었노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정말이지 이번 행사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전세계 각국에서 백여명의 지법인 손님들이 방문하였고, 글로벌 컨퍼런스를 위한 사전 세팅부터 행사 호스트까지 도맡아야만 했다. 급하게 브로셔와 현수막을 준비하고 데모지원과 장비세팅을 점검하고, 당일 새벽에는 손님들 인솔하러 강남의 호텔 앞까지 나가 인원을 체크해야 했다. 늦잠을 자느라 전화를 안 받고 누구는 아예 귀국해버렸다고 하니 모든 룸에 전화를 걸어 일일이 확인을 해야만 했다.
부서 사정으로 인해 나와 동기 한명이서 이 모든 걸 진행해야 했고, 우리는 당시 고작 입사 8개월차였다.
촌각을 다투는 일정으로 단내나던 긴 하루가 끝나고 나는 다리에 힘이 쫙 풀렸다.
"수고했다."
그런데 그때 부장님의 진심어린 그 한마디로 모든 고생이 보상받는 느낌이었던 것이다.
회사에서 좋은 상사를 만날 확률은 5~6번 중에 한 번 꼴이라고 한다.
'좋은 상사'의 정의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어떤 상사는 사람은 좋은데 일이 답답하고, 어떤 상사는 일할 땐 나이스한데 일상 생활이 불편할 수도 있다.
어떤 상사는 다 멀쩡한데 술만 마시면 괴로워지고, 어떤 상사는 일할 때건 멀쩡할 때건 술을 마실 때건 늘상 이상한 사람도 가끔은 있다.
또한 사람마다 관점이 다르기에 누구에겐 천사인데 누구에겐 악마인 상사들도 있다.
회사 생활을 조금 하다보면 깨닫는다.
완벽한 상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좋은 상사는 가끔 만난다. 그러나 싫은 상사를 피하기란 정말 힘든 일이라는 것을.
물론 내가 본 상사들은 대부분 일하느라 바쁘지만 아들 딸들에게 자상한 보통 아빠들이었다. 그러나 일부 과거의 군대식 산업화 문화에 익숙해져 여전히 그 때의 관행으로 자리를 지키고 계시는 분들도 분명 있었다.
2.
나는 비교적 상사복이 좋은 편이었다.
처음 입사했을 때 나의 상사는 '일을 했으면 성과를 내라'라는 책을 선물해 주셨다. 나는 뜨악- 적잖이 부담이 되었지만 돌아보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목표를 설정하고 계획을 수립하며 우선순위별로 관리하는 법, 일이 끝난 뒤에 사후반성(Postmortem) 과정을 통해 아쉬운 점을 보완하고 잘된 점을 강화하는 법, 그리고 백점짜리 보고서를 일주일 뒤 리뷰하는 것보다 50점짜리라도 바로 오늘 오후에 리뷰하는 것이 서로를 위해 더 좋다는 사실 등 가장 기본적인 업무 태도에 대해 제대로 학습할 수 있었다. (실제로 이렇게 업무처리하는 경우는 대기업에서도 흔치 않다.)
나의 상사는 항상 명확한 가이드가 있었고, 일의 중요도에 따라 처낼 것과 집중할 것을 알고 있었으며, 중간에 수시로 커뮤니케이션하는 것을 늘 환영하였다.
나중에 작은 결과물이 나왔을 때도 임원에게 나의 공을 드러내었고, 이후에도 적절한 위임과 인정을 보여주셨던 것이다. 그리하여 나중에 내가 상사의 생일에 '제대로 시켜라'라는 책을 선물드렸을 때에도 가벼운 위트로 받아주셨다.
이후에 만난 상사들도 대부분 합리적이고 똑똑한 분들이었다.
물론 가끔 내 성향과 잘 맞지 않아 답답하거나 스트레스를 받는 경우도 있었다. 그럴 땐 그냥 참는 도리밖에 없었다. 나는 별다른 내색을 않는 스타일이었지만 아마 얼굴에 있는 수심과 불만이 가득한 표정은 쉽게 숨기지는 못했던 것 같다.
나도 정말 참기 힘든 날에는 동기를 붙잡고 상사를 안주 삼곤 했지만, 동기들의 하소연을 들어줄 때가 더 많았다.
대부분의 주변 동료들도 똑같이 상사를 참고 살아가고 있었다. 남녀 할 것 없이 대부분 상사에게 폭언이나 비하 등 괴롭힘을 당하거나 출장이나 회식 중 성희롱을 당한 경험들이 있었다. 평소에는 무탈하게 일하며 지내다가도 가끔 - 아니면 더 자주 - 상사들의 보이지 않는 발에 시달리곤 했던 것이다.
3.
그럴 땐 우리는 상사병(上司病)에 걸린다.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상사병(相思病)'과 회사에서 겪는 '상사병(上司病)'은 묘하게 증상이 닮았다.
상사병에 걸리면 밥맛이 없고 가슴이 답답해진다.
상대방 앞에만 서면 한 없이 작아지고 자신감이 없어진다.
그 사람의 행동 하나 하나를 지나치게 의식하고 눈치를 살피게 된다.
혹시라도 연락이 오면 가슴이 덜컥 내려앉아 온갖 생각이 든다.
그 사람 생각에 자다가도 이불킥을 하게 된다.
칭찬 한마디에도 하늘을 날고 질책 한번이라도 깊은 절망감에 빠지며 천국과 지옥을 오르내린다.
이 병이 너무 심해지면 실제로도 아프다고 한다. 어느 연구결과에는 입사 후 신입사원들의 평균 병원 진료비가 10% 증가했다고 한다. 대부분 위염, 기관지염, 피부염 등 스트레스성 질환이었다.
(한겨레신문, 2015.2)
상사병을 치유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고백이다.
고백을 위해선 아주 큰 용기가 필요하다.
(작은 용기로도 고백이 가능해지는 분위기를 만들 수 있어야 한다.)
또는 시간이 지나고 새로운 좋은 사람을 만나면 상사병은 치유될 수 있다.
비록 당시에는 힘들지만 한 번 앓고나면 정신적으로 한층 성장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4.
퇴사학교를 하면서 요즘은 내가 상사 역할을 하게 되었다.
함께 일하는 후배들을 쪼는(?) 내 모습을 보며 어느새 이 친구들도 상사병에 걸리는 건 아닌가 덜컥 겁이 날 때가 있다.
(워낙 기본이 훌륭한 동료들이라, 함께 일을 할 수 있다는 건 정말 감사한 일임을 알고 있다.)
그러면서 자리가 바뀌면 풍경도 바뀐다는 말, 매일 절감하고 있다.
어떻게 하면 내가 다시 꼰대화(?)가 되는 악순환을 막을 수 있을까 고민이 많아지는 요즘이다.
(다음편 예고)
27. 꼰대의 탄생
- 꼰대는 어떻게 만들어지고 확대 및 재생산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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