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 때 처음 교복을 맞췄다.
당시 조그만 중1 짜리가 XL 사이즈를 입었다. 벨트 없이는 바지가 내려가고 재킷 어깨는 왜 그렇게 넓은지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내가 금방 자라면 그 옷이 곧 맞을 줄 알았다. 그러나 그때의 키는 지금의 키와 그리 다르지 않았고, 나는 그렇게 학창시절 내내 몸에 맞지 않는 큰 옷만 입고 다녔다.
대학생 때는 이상한 멋이 들어 몸에 착 달라붙는 옷만 골랐다. 동대문 가게의 형은 한 치수 작게 입는 게 핏이 젤 예쁘다고 말했다. 그 말에 꽂혔는지 쫘악 붙는 쫄티에 스판바지 차림이 제일 근사해 보였다. 나와 어울린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사실 의자에 앉기에도 불편한 그런 옷들이었다.
예전에 어느 선배를 만난 적이 있다.
늦깎이 군 입대를 한 선배는 뒤늦은 막내 생활을 하며 고생을 했지만 한결같은 성실함으로 미래를 준비했다.
그렇게 꾸준히 준비한 선배는 제대 후 신학대학원을 갔고 최근에 목사 안수를 받았다.
지금도 매일 새벽같이 일어나랴 아이들을 섬기랴 바빠 보이는 형에게,
"어떠세요?" 물어보니,
형은 빙긋 웃으며 자기 몸에 맞는 옷을 입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때 난 그 말이 너무 부러워졌다.
서른 해가 넘도록 내 몸에 맞는 옷을 찾아다녔는데, 그때 난 아직도 내 몸에 맞지도 않는 어색한 옷을 입고 서 있었다.
내가 입은 옷의 부피는 점점 커져가는데, 나란 사람의 질량은 점점 가벼워졌다.
이제는 오히려 그 옷이 잘 맞는 거라며 착각하는 지경에 이르렀던 것이다.
인생은 학교처럼 단계별로 성장하는 게 아니었다.
1학년보다 4학년이 더 많이 배울 거라는 착각.
스무 살보다 서른 살이 더 성숙할 거라는 착각.
내일 새벽도 양재역에서 셔틀버스를 타고 회사에 다니듯,
그렇게 내 인생의 버스가 알아서 배차될 수 있으리라는 착각.
<그러던 어느 날, 군 시절 읽었던 책 한 권이 생각났다. 바로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의 '월든(Walden)'이었다.
소로우는 삶의 본질을 탐구하기 위해 월든이라는 호숫가에 작은 오두막을 짓고 2년 2개월간의 자급자족하는 생활을 기록했다.
당시 내게는, 대학 가고 취업하는 삶의 방식이 아니더라도 자연 속에서 직접 노동하며 살아갈 수 있다는 점이 충격으로 다가왔다. 무엇보다 최소한의 노동만으로 생활을 영위하며, 그 외에는 오직 자신과 삶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로 가득한 시간들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당시 소로우는 월든의 성공을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고 한다. 월든에서 사는 2년 2개월 동안 특별한 통찰이나 계시의 순간 같은 건 없었다. 오히려 그는 호숫가에서 나온 뒤 무려 7년이 지나고 나서야 겨우 원고를 완성할 수 있었다.
주석 달린 월든,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제프리 S. 크래머 주석, 강주헌 역
그러나 현재 '월든'은 개인의 실존과 현대 문명의 폐해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을 지닌 고전 중의 고전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런 소로우가 처음 월든으로 이주한 결정적인 동기 중 하나는 바로 그의 절친인 랄프 왈도 에머슨의 연설 때문이었다.
산바람에 원대한 꿈을 꾸고 하나님의 별빛을 한몸에 받으며 드넓은 해안에서 삶을 시작하는 창창한 미래를 지닌 젊은이들은 이 땅이 하늘의 별들과 하나가 되지 못한다는 걸 절감하고, 기업을 운영하는 원칙들에 넌더리를 내며 과감히 행동하지 못한다.
젊은이들은 다람쥐 쳇바퀴 돌듯 무의미하게 살아가거나 지겨운 삶을 억지로 견딘다.
수많은 젊은이가 경력을 쌓기 위해 희망을 품고 장벽을 향해 몰려가지만, 한 사람이라도 본능에 따라 꿋꿋하게 행동하는 삶을 살아갈 때 온 세상이 그를 본받게 될 거라는 진리를 아직 깨닫지 못했다.
인내하고 인내하라. 다수를 위해 훌륭하고 위대한 것을 생각나게 해주며, 그대만의 무한한 삶의 관점을 위안으로 삼고, 원칙을 연구하고 교환하며 그런 본능이 대우받는 방향으로 세상을 바꿔가도록 힘쓰라.
우리는 우리의 발로 걸어야 하고, 우리의 손으로 일해야 하며, 우리의 머리로 말해야 한다.
- 랄프 왈도 에머슨, 1837년 '미국의 학자' 강연 중
200여 년 전 미국 보스턴에서의 한 어느 외국인의 강연은 마치 오늘날 서울의 나에게 말하듯 생생했다. 난 당장 뛰쳐나가 오두막을 지을까 생각했지만, 내가 그럴 위인도 환경도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대신 난 이 시간들을 남겨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겪은 지난 회사 생활이 아무 의미 없는 것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훗날 새로운 길을 갈 때 제대로 걸어가기 위해서라도, 난 삼성에서의 지난 시간들을 반추해야만 했다.>
졸작 <초일류 사원, 삼성을 떠나다> 프롤로그 중
그렇게 나는 감히 월든을 흉내내진 못하더라도 나만의 작은 인생의 실험들을 해보고 싶어 졌다.
만약 내 인생이 1년밖에 남지 않았다면, 난 무엇을 가장 하고 싶은가?
만약 내일이 인생의 끝이라면, 난 오늘 무엇을 시작해야 할까?
계속해서 그런 질문들을 던졌을 때, 주변에서 원하는 것들, 세상 사람들의 인정, 나 자신의 브랜드와 스펙, 무언가에 저당 잡혀 미루게 되는 것들이 가라앉고 단 하나의 '마음의 소리'만이 남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글이었다.
글.
내가 가장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순간.
밥 먹는 것도 잊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몰입하게 되는 것.
밤이 늦어도 피곤함을 모르고 아침에 저절로 눈이 떠지게 되는 일.
한 번쯤은 내가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도, 아무런 성과가 없더라도 행복할 수 있는 의미.
그것은 바로 내게는 글이었던 것이다.
일본에서는 남자 나이 서른이 되면 인생의 큰 결단을 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기는 문화가 있다고 한다.
퇴사 후 이것저것 실험하고 싶은 게 있었지만, 가장 먼저 하고 싶은 것은 역시 글이었다.
그렇게 나는 6개월이 넘는 시간 동안 100여 권의 책을 읽으며 글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중간에 잠깐씩 다른 일도 하며..)
내 안에 하고 싶은 말들이 이렇게 많았던가.
아침에 눈을 떠 글을 쓰고 집에서 점심을 해 먹고 오후에 산책과 함께 또 글을 쓰며, 밤늦도록 글을 쓰는 하루.
돈 걱정이 없다면 평생 이렇게 살아도 좋을, 그런 시간들을 한껏 만끽했다.
그리고 몇 달 뒤 - 그 결과는 지금 브런치에서도 보고 계시듯 - 나에겐 너무나 과분한 출간이라는 큰 선물로 돌아왔다.
작년 한 해, 퇴사 이후의 삶이 그리 녹록지는 않았고 지금도 여전히 허덕이지만,
나에겐 정말이지 잊을 수 없는 격려가 되어 준, 감사한 선물이었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브런치와 독자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린다)
그러나 사실 작년 한 해는 부끄럽고 막막한 일들이 더 많았다.
퇴사하고 얼마간은 해방감과 자유가 봄날의 산들바람처럼 나를 축복해 주었지만,
이윽고 난 깨달았다.
퇴사는 만능열쇠가 아니라는 사실을.
퇴사 자체는 대수가 아니다. 퇴사 후 어떤 인생을 사느냐, 그리고 퇴사하지 않더라도 어떻게 회사에서 잘 살아갈 수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
그냥 회사를 나가는 것은 사실 아주 쉬운 일이다.
토니 스타크처럼 테러단체에 잡혀 아이언맨 수트를 만들어 탈출하는 것도, 프리즌 브레이크처럼 엄청난 설계도와 전략이 필요한 일도 아니다.
"저 회사 나가요." 하고 말하고, 그냥 짐을 꾸리고 저벅저벅 걸어 나가면 되는 일.
아이러니하게도,
돈 받으며 회사를 다닐 때에는 회사를 나가면 진정한 삶의 의미와 가치를 추구하며 살겠노라고 다짐하던 나는,
회사를 나오고 나서는 오히려 삶의 의미와 가치는커녕, 어떻게 돈을 벌어야 할까를 먼저 고민하며 불안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제야 난 깨달았다.
온갖 스트레스 속에서도, 자신의 가족들에 대한 책임감으로 묵묵히 견뎌내는 수많은 가장들의 위대함을 말이다.
(사족으로, 그렇게 삼십 년을 내리 책임만 지시던 우리 아버지의 어깨 역시 아주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이렇듯 퇴사 이후의 삶은 나 자신의 좁았던 시야를 깨닫고 한층 다채로운 인생을 마주하게 된, 늘상 즐겁지만은 않았지만 반드시 필요한 시간들이었던 것 같다.
여전히 난 이 순간에도 불안감과 막막함, 두려움들을 껴안고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 숱한 두려움과 불안감에도 불구하고 '후회'는 없다는 것이다. 다시 그때로 돌아가더라도 아마 난 같은 선택을 하게 될 것이다.
난 이제 겨우 '내게 맞지 않는 옷'을 벗었을 뿐이다.
아직 내게 꼭 맞는 완벽한 옷은 찾지 못했지만, 아무래도 그 옷을 찾아가는 여정은 비록 길고 어려울지라도, 자못 설레일 것 같다.
인생에는 두 번이 없고, 작년의 끝은 올해의 시작이다.
그런 의미에서 난 <시작과 끝>이라는 말보다, <끝과 시작>이라는 말이 더 좋다.
퇴사라는 끝은 결국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기 때문에.
새해에는 우리 모두 무언가의 끝과 또 새로운 시작을 소망할 수 있기를.
두 번은 없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런 연습 없이 태어나서
아무런 훈련 없이 죽는다
우리가 세상이란 이름의 학교에서
가장 바보 같은 학생일지라도
여름에도 겨울에도
낙제란 없는 법
반복되는 하루는 단 한 번도 없다
두 번의 똑같은 밤도 없고
두 번의 같은 입맞춤도 없고
두 번의 동일한 눈빛도 없다
힘겨운 나날들
무엇 때문에 너는
쓸데없는 불안으로 두려워하는가
너는 존재한다, 그러므로 사라질 것이다
너는 사라진다, 그러므로 아름답다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끝과 시작> 중, '두 번은 없다'
<참고서적>
월든,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제프리 S. 크래머 주석, 강주헌 역, 현대문학, 2011년
끝과 시작,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최성은 역, 문학과지성사, 2007년
올해부터는 새로운 <퇴사의 추억> 시즌2가 시작될 예정입니다.
퇴사 이후의 삶에 대해 부끄럽지만 또 다양한 생각들로 찾아뵙겠습니다.
퇴사 전의 회사에서의 생각과 경험들에 대한 풀버전은 단행본 <퇴사의 추억>에서 보다 다채롭게 만나실 수 있습니다.
작년 한 해 진심으로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새해에도 다들 건승하시고 더 행복하시길 바라겠습니다.
티거 Jang 드림
<퇴사의 추억> 단행본이 출간되었습니다.
브런치에는 전체 내용의 일부만 공개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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