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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거 Jang Feb 06. 2016

진부화된 삶을 떠나



1.

모든 것들에는 유통기한이 적혀 있다.
만약 사랑에 유통기한을 적어야 한다면 난 그 기간을 만년으로 적고 싶다.
- 중경삼림 中



모든 것에는 기한이 있다. 짧게는 한 번 쓰고 버리는 것에서 길게는 몇 백 년짜리도 있다. 제품의 기한을 PLC(Product Life Cycle)라고 부른다. PLC가 짧을수록 제품을 더 많이 팔 수 있다. 보통 냉장고는 10년, 스마트폰은 2년의 PLC를 갖는다. 같은 백만 원짜리라도 스마트폰 시장이 냉장고 시장보다 훨씬 크고 빠르게 변하는 이유이다.

그렇다면 스마트폰의 PLC는 누가 정한 걸까? 왜 우리는 하필 2년마다 스마트폰을 교체해야만 하는 걸까?

외국의 한 언론에서는 아이폰의 예를 들며, 이를 OS를 업데이트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매번 iOS를  업데이트할 때마다 더 많은 기능과 저장공간이 필요하며, 이는 결국 스마트폰을 더 느리게 만든다는 것이다.

허핑턴 포스트, 애플은 어떻게 당신에게 재구매를 유도하는가

기자는 말미에, 이러한 정책은 결과적으로 2년마다 아이폰의 재구매를 유도하게 된다고 지적한다. 다른 스마트폰도 마찬가지이다. 사용 후 1년만 지나도 모두가 약속이나 한 듯 구동이 느려지고 잔고장이 잦아지며 배터리 수명이 점점 짧아지는 것을 우리는 충분히 경험했다. 아무리 제품을 깨끗하고 조심스럽게 사용해도 마찬가지이다. 그렇게 우리는 자연스레 신제품으로 눈을 돌리고 그러면 그 신제품 역시 2년 뒤에는 똑같이 망가질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프랑스의 철학자 세르주 라투슈는 '계획적  진부화'라고 말한다.

낭비사회를 넘어서, 세르주 라투슈

기업의 매출 성장을 더 빠르게 하기 위해 제품의 수명을 인위적으로 단축하는 것이다. 마모되지 않는 면도날, 올이 풀리지 않는 스타킹, 영구적으로 빛나는 전구. 이런 기술들이 이미 있지만 기업들은 일부로 쓰지 않는다. 면도날이 영원히 마모되지 않는다면, 전구가 영원히 빛날 수 있다면 그 회사들은 곧 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오늘날 '계획적 진부화'는 전 영역에 걸쳐 발생한다. 주택은 2~30년만 지나도 금세 낡고, 자동차도 5년 이상을 타지 못한다. 어떤 옷은 일 년만 입어도 헤지고, 일회용 접시들은 한 번 쓰고 버려진다. 대형 마트에서 온갖 할인 상품을 잔뜩 사 오지만 절반 이상은 유통기한이 지나 버려진다.


매일 지출했고 매일 낭비했으며 매일 폐기하는 생활이었다.
- 소비를 그만두다, 히라카와 가쓰미


매일 우리는 이전 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찾는다. '유행을 따라가며 소비와 낭비를 즐기고 습관적으로 제품을 바꾸며 자신이 소유한 화려한 것을 과시한다.'

낭비사회를 넘어서, 세르주 라투슈

어쩌면 그것은 비단 제품의 수명 문제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자주 우리는 유통기한과 수명이 넉넉히 남아도 습관적으로 소비를 한다. 이처럼 유행과 광고에 영향을 받은 소비자들은 '심리적 진부화'를 양산한다.


오늘날 진부화는 가속화된다. 더 많은 성장을 위해 더 많은 생산이 필요하고, 더 많은 생산을 위해 더 많은 소비가 필요하다. 더 많은 소비를 위해  또다시 더 많은 진부화가 일어나는 순환이 반복된다.

그렇게 우리는 '일상을 소비로 탕진하면서 삶의 의미를 사소한 데서 찾는'

편의점 사회학, 전상인

'일상의 진부화' 속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진부화의 종착점은 결국 '인간의 진부화'로 귀결된다.

세르주 라투슈는 '인간의 진부화'로 인해 시간은 붕괴되고 한시성이 승리할 것이라고 지적한다. 모든 것이 진부화 되기에 사람들은 더 이상 영속적인 아름다움이나 가치 같은 것을 중시하지 않는다.


'우리는 더 이상 미학적 세계 속에서 성당을 짓지 않는다. 대신 주택들은 30년의 감가상각에 맞추어 (천편일률적인 시멘트로) 상업적으로 지어진다.'

낭비사회를 넘어서, 세르주 라투슈

사랑도 1년 6개월짜리 수명을 다하면 진부해진다. 상품도 인간도 지금 당장 '요긴'한 것이 아닌 것은 가치를 상실한다. 일회용 제품이 확산될수록 상품은 쓰레기로 버려지고 인간은 소외되거나 사용 후 해고된다.


그렇게 우리의 제품과 생활과 인생도 사랑도 모든 것은 점점 진부화된다.



낭비사회를 넘어서, 세르주 라투슈





2.

어릴 땐 모든 게 진부하지 않았다.

모든 게 새로웠고 처음이었다. 처음 누군가를 좋아하던 그 순간의 강렬함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그러한 첫 경험들은 어느 바람 부는 고요한 밤 누워 떠올리고 싶을 만큼 또렷한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항상 자기 전에 지나온 삶을 복기해 보는 취미가 생겼다. 무슨 거창한 사색 같은 건 아니었다. 그저 그때 내가 처음 누굴 만났고, 어디에 살았고, 뭐가 재밌었는지 따위의 소소한 되새김질이었다.

네 살 흐릿한 기억에서 시작한 내 복기는 점점 또렷해지는데, 5학년 때 반장을 했지,  그때 엄마가 반 전체에 불갈비버거를 돌렸는데 너무 아까워서 먹질 못했어. 태봉이와 재천이가 가장 친했는데 이사 간 뒤부터는 점점 멀어졌어. 청주에서는 교회 형들과 야밤에 동네 골프장에 몰래 들어가 수다를 떨었지. 내가 또 이사를 갔고  그때 그 여자애랑은 그렇게 헤어졌, 아니 차였었지.

그렇게 난 내 과거의 처음 겪은 영광과 오욕의 세월을 역주하며, 때론 설레고 때론 안타까움에 잠 못 이루며 매일같이 인생을 복기하곤 했다.


복기가 멈춘 곳은 군대에서였다.

그곳에서는 과거에 대한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2년간 모든 주파수는 전역일에 맞추어 있었고, 매일을 계수하던 나는 자유인만을 꿈꾸었지만, 그땐 오히려 불안감에 더 미래를 계획하려 들었다. 제대하면 토익 따야지, 방학 땐 무슨 인턴 하고, 졸업하면 여기로 가고, 연애는, 결혼은, 내 꿈은 이렇게 되리라... 조금의 차질이라도 생길라 항상  그다음 목표, 그다음 단계를 위해, 그 어떤 의미 있는 완결 없이 미래를 위해 현재를 저당 잡혀야 했던 나의 이십 대.


출처 : 미생


그 후 삼십 대가 된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복기하지 않게 되었다. 이제는 잠들기 전 무엇을 떠올려봐도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다.

회사에서의 나는 그저 오늘 하루의 피곤함과 내일의 걱정, 그리고 평일을 참고 견디다 보면 찾아올 단비 같은 주말만을 기다리는 것이 전부인 삶이었다.

과거를 복기하지도, 미래를 꿈꾸지도 않는 삼십 대.

기록해야 할 것은 많아졌지만, 기억해야 할 것은 줄어갔다.

어차피 내일도 그 다음날도 오늘처럼 일할 것이고, 월급은 따박따박 들어올 것이기에 당분간의 미래가 불안할 것도 없었다.

이대로 쭈욱 갈 것이라는, 그리고 갈 수 있으리라는 안주함.


과거를 적당히 살았으며, 아직은 꿈꿀 게 더 있다면 있지만서도,
그렇다고 그렇게 새롭지도 막연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이상주의자도 현실주의자도 되기 어려운,
그저 젊지도 늙지도 않은
그런 삶.


그렇게 내 삶은 스스로 진부해져 가고 있었다.




3.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 전도서


퇴사 이후, 나는 진부화된 삶을 청산하기로 했다.

지금도 나는 가끔 내가 무슨 정신으로 퇴사를 감행했는지 신기할 때가 있다.

또렷한 목표가 있던 것이 아니었기에, 아마 진부함을 떨치기 위한 것이 가장 크지 않았나 싶다.


나는 다시 어릴 적 그때처럼 매일의 삶을 새롭게 그리고 생생하게 맞닥뜨리게 되었다. 어릴 때처럼 완전히 막연한 새로움은 아니지만, 삼십 대에 마주하는 불안한 첫 경험들이 기꺼운 것은 왜일까.


요즘엔 이십 대 친구들과 함께 일하며 부대끼며 많은 것을 느낀다. (실은 나이차가 그렇게 크지도 않지만) 중요한 것은 나이의 숫자가 얼마냐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인생이 진부화되어 심드렁해진 사람과, 아직 새로운 꿈과 고민으로 미지의 세계를 탐색하는 사람의 차이인 것 같다.


자신의 꿈과 포부를 자랑스레 말하는 후배들의 눈빛을 보며 봄날의 새순과 같은 싱그러움을 느낀다. 사회 문제 해결, 더 나은 미래, 혁신, 도전과 같은 단어를 깊이 고민하고 몸소 실천하려는 사람에게서는 그 어떤 진부함도 찾아볼 수 없다.

그들에게서 내가 아주  오래전에 잃어버린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면서 어느새 이미 진부화된 내 생각들을 - 꼰대처럼 내가 겪어보니 그건 안돼 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을 - 내려놓고 다시금 새로운 꿈을 꾸어보게 된다.

인생을 지금의 모습으로 결정지어 버린다는 것. 이대로 계속해서 진부하게 놓아두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또 있을까.


UNDERDOGS Final Ceremony


진부화를 벗어나는 몇 가지 방법이 있다.  

오늘 같은 설날에는 새해 하지 못한 것들을 다시 시작하며 진부함을 떨쳐낸다.

얼마 전엔 입춘이었다. 봄처럼 다시 피어날 날을 준비해 본다. 늘 바뀌는 계절은 가장 진부하지 않다.

가끔씩 찾아 듣는 노래들은 나의 진부함을 일깨워준다. 반복하면 식상해지는 개그와 달리 노래는 다시 들어도 진부하지 않다. 인생의 전환점마다 그 노래를 듣고 나는 다시 산뜻해진다. 거기서 나오는 감성들은 나를 다시 여미고 누르고 추켜 올려 세우다가 내동댕이 치기도 하면서 어느새 꼬옥 감싸 안아준다.


출처 : 붉은 돼지


그러나 이 중에서 가장 진부하지 않은 것은 바로 아내이다.

내 아내는 도무지 진부화되지 않는다. 그녀와 대화를 나누면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것처럼, 늘 새롭고 재밌으면서도 한편 마음이 아리는 것이다.







<참고서적>

낭비사회를 넘어서, 세르주 라투슈, 정기헌 역, 민음사, 2014

소비를 그만두다, 히라카와 가쓰미, 정문주 역, 더숲, 2015

편의점 사회학, 전상인, 민음사,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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