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출장을 갔다. 고급 호텔과 고급 리무진.
캐리어를 질질 끌며 이국의 정취를 만끽한다. 번쩍이는 사무실 빌딩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업무를 마치면 어김없이 2차 술집으로 향한다. 주재원이 자신 있는 표정으로 와인과 푸아그라를 시킨다. 오늘 나를 처음 본 주재원은 취했는지 연신 무언가를 혼자 중얼거린다.
"똑바로 하라고 imma 똑바로..."
"예-예-" 한참을 받아주던 난 문득 십여 년 전의 여행이 떠올랐다. 1달러 짜리 숙소와 낡은 픽업트럭.
캄보디아의 국경 어딘가. 이십 대 생애 처음으로 훌쩍 여행을 떠났다. 흙먼지 잔뜩 뒤집어쓰고 국경의 어느 시장에 들렀다. 좌판에서 1달러에 소시지 꼬치 두개를 샀다. 하나는 내가 먹고 하나를 주인아주머니께 드리니 신기한 듯 나를 쳐다보신다.
낡은 트럭 짐칸에 앉아 현지인 수십 명과 함께 국경의 들판을 달렸다. 10시간이 넘도록 트럭 위로 우주의 별들이 쏟아지고 아시아의 대지의 바람이 나를 휘감았다.
이상하게, 도마뱀과 벌레들이 기어 다니던 그 1달러짜리 게스트하우스가 지금의 화려한 호텔보다 더 그리워지는 건 왜일까.
트럭에서 만난 소년이 생각난다. 10살쯤 되었을까. 웃통을 다 벗어 검게 그을린 깡마른 몸매가 드러났다.
소년은 장사를 하며 영어를 조금 배웠다. 한국에 관심이 많아 이것저것 물어보고, 자신도 공부를 하고 싶지만 형편상 그럴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주섬주섬 검은 봉다리에서 때 묻은 귤 몇 개를 꺼내 주었다. 조악한 귤에서 단 맛이 느껴졌다.
주재원은 자꾸 푸아그라를 먹어보라고 권한다. 난 억지로 잘게 잘라 우물우물 씹으며 잽싸게 와인을 들이킨다. 최고급 음식과 와인에도 속이 쓰린 것은 푸아그라 때문만은 아니겠지?
2.
퇴근길 어느 날,
우연히 어떤 영상을 본 적이 있다.
사이먼 시넥(Simon Sinek)이란 사람의 리더십 강연인데, TED 최다 조회수를 기록할 만큼 -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 꽤 유명한 영상이었다.
그는 'Golden Circle'이라는 흥미로운 그림을 제시한다. 위대한 리더들의 성취와 동기부여는 모두 Why에서 시작한다는 것이다. 반면 대부분의 평범한 조직 및 개인은 What 또는 How에만 집중한다고 말한다.
그는 애플을 예로 든다. 애플은 항상 'Why -> How -> What' 순으로 커뮤니케이션을 하며 그 반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1순위 <Why> : 우리는 인류에게 최고의 가치를 주고 싶어요.
2순위 <How> : 그것을 위해 뛰어난 사용자 경험과 디자인, 컨텐츠를 제공할 겁니다.
3순위 <What> : 짜잔, (그 결과) 멋진 제품이 탄생했어요!
내 열정의 대상은 사람들이 동기에 충만해 위대한 제품을 만드는 영속적인 회사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이윤이 아니라 제품이 최고의 동기부여였다. 스컬리는 이러한 우선순위를 뒤집어 돈 버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 스티브 잡스 자서전
세계 최대의 이윤을 내고 있는 애플은, 아이러니하게 이윤 추구가 일 순위 목적이 아니었다. 잡스는 그의 자서전에서 말한다. 위대한 제품을 만드는 것이 최고의 동기부여였다고.
반면 다른 대부분 기업들은 'What -> How -> Why'의 순서로 커뮤니케이션을 한다.
1순위 <What> : 짜잔, 멋진 제품이 탄생했어요!
2순위 <How> : 그것은 뛰어난 스펙과 첨단 기술들로 중무장했지요.
3순위 <Why> : (왜냐구요?) 음... (고민하다가) 인류의 행복을 위해서지요.
실제로 모 스마트폰 제품이 처음 출시되었을 때, 마케팅 팀에서는 고민이 많았다고 한다. 어떠한 컨셉과 가치로 고객에게 차별화를 전달할 것인가? 처음부터 최첨단 스펙과 기술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제품이라 고민 끝에 특정 슬로건을 뒤늦게 붙였다고 한다. 각종 신기하고 재밌는 기능들로 당신의 인생의 동반자가 되겠노라는 좋은 의미였지만, 실제 사용자들은 그 기능들을 별로 필요로 하지 않았다.
연세대 신동엽 교수는 이를, '기업의 정당성'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정당성과 효율성의 패러독스 넘어라, 신동엽 교수, DBR, 2011
사회공헌을 많이 함에도 불구하고 대기업의 인식이 좋지 않고, 오히려 기부에 인색한 애플이 존경받는 이유를 신동엽 교수는 '기업의 정당성'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소비자를 위한 최고의 가치를 제공하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다. 스마트폰 기업이라면 우선 스마트폰을 기똥차게 잘 만들고, 자동차 회사라면 우선 자동차를 기똥차게 잘 만드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어디 기업뿐만이랴.
정부도 사회도 개인 역시 각자의 '정당성'을 찾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이쯤 되니 공자의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라는 말이 떠오른다. 흔히 이 말은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아비는 아비답게, 자식은 자식답게' 각자의 위치와 분수를 지키자(?)는 뜻으로 알고 있지만, 다른 해석도 있다.
'군군신신(君君臣臣)', '부부자자(父父子子)'를 사자성어로 따로 떼어내면 뜻이 완전 달라진다.
즉, 임금이 임금다워야 신하도 신하답고, 아비가 아비다워야 자식도 자식답다는 것이다. 결국 사회와 조직에서 리더들과 윗사람들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뜻으로도 볼 수 있다.
출처 : 김종환 대구대 교수
http://blog.daum.net/king3926/65
3.
그렇다면, 내가 나다운 것은 무엇일까.
나 역시 어딘가에선 리더로서, 또 어딘가에선 사회와 가족의 구성원으로서 어떠한 정당성을 가져야 할까.
'인간의 정당성'을 위해 난 어떤 가치를 찾아야 하는 걸까.
인생의 팔 할이 넘는 시간을 회사에서 보내는 나로서는, 당연히 나의 정당성은 회사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우리에게 회사란 어떤 곳일까. 그곳에서 하는 일이란 또 어떤 의미일까.
'작은 것이 아름답다', '적정기술' 등과 같은 경제철학을 제시하고, 거대기술과 물질문명에 근원적 질문을 던지며 인류의 '생각의 대전환'을 이루어낸, E.F. 슈마허는 그의 저서 '굿워크(Good Work)'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 삶의 중심에 노동이 자리 잡고 있기에 경제학, 사회학, 정치학 등 관련 학문에는 노동에 관한 이론이 필수적으로 담겨야 한다.
인간은 대부분 에너지를 노동에 쏟고 있으며, 누군가를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방법은 '무슨 일을 하는지' 이기 때문이다.
인격과 성격 형성에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도 노동인데, 수업시간에 노동자에게 노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거의 논의되지 않는다.
경영자는 노동자의 신체가 훼손되었다고 하면 관심을 갖지만, 노동자의 두뇌와 정신, 영혼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다.
- 굿워크 (Good Work), E.F. 슈마허
우리는 지금 일을 해도 불안하고, 일을 하지 않아도 불안한 시대에 살고 있다.
또한 모든 힘을 다해 스펙을 쌓고 치열한 경쟁의 승자가 되었지만, 여전히 공허하고 무언가 미루고 있는 것만 같은 찝찝함에 사로잡힌 채 하루하루를 떠밀려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저 오늘 하루도 What이 무엇인지를 좇으며, 'What을 위한 What'만을 열심히 성취하며 바쁘게 지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 역시 새해 첫날부터 연말이 될 때까지 일 년 내내 누군가로부터 내게 주어진 What만을 달성하기 위해 그렇게 열심히 이십 대를 바쳐 왔지만, 그럴수록 '다 했지만, 다 얻진 못한' 그런 삶을 살아왔던 것 같다.
어느 날 휴가를 내어 혼자 있는 시간을 갖고 나서야 깨달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 순간에, 난 What을 잠시 내려놓고 Why에 대해서, 그리고 나란 존재의 정당성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다는 것을.
나는 아무 의미도 없는 치열한 경쟁에 뛰어들고 싶지 않다.
나는 기계와 관료제의 노예가 되어 권태롭고 추악하게 살고 싶지 않다.
나는 바보나 로봇, 통근자로 살고 싶지 않다.
나는 누군가의 일부분으로 살고 싶지 않다.
나는 내 일을 하고 싶다.
나는 좀 더 소박하게 살고 싶다.
나는 가면이 아니라 진짜 인간을 상대하고 싶다.
내겐 사람, 자연, 아름답고 전일적인 세상이 중요하다.
나는 누군가를 돌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 굿워크 (Good Work), E.F. 슈마허
이후 슈마허의 글귀가 폐부를 찌르는 것 같았다.
기업에도 정당성의 회복이 필요하듯이, 나에게도 좋은 노동을 통해 가치를 회복하는 일이 무엇보다 필요했다.
우리는 일 없이는 살 수 없다. 일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정당성' 없이, 'Why' 없이 'What'만을 추구하는 나쁜 환경들이 너무 많을 뿐.
노동을 하지 않으면 삶은 부패한다.
그러나 영혼 없는 노동을 하면 삶은 질식되어 죽어간다.
- 알베르 카뮈
마침, 출장에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영화 한 편을 보았다.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Motorcycle Diaries, 2004)'
두 청년이 오토바이 하나를 의지해 남미의 야생의 벌판을 달리는 장면을 보며, 난 십여 년 전 동남아의 나를 떠올렸다.
그 때 생각했다.
난 화려한 호텔의 푸아그라보다, 이름 모를 시골길의 조악한 귤이 더 먹고 싶어졌다.
배드워크(Bad Work)에서 굿워크(Good Work)의 길을 찾아 떠나기로 한 것이다.
<참고서적>
굿워크 (Good Work), E.F. 슈마허, 박혜영 역, 느린걸음, 2011년
DBR, 신동엽 교수, 2011년
스티브 잡스 자서전, 월터 아이작슨, 안진환 역, 민음사, 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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