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나라

by 티거 Jang



신입생 시절, 3월 말 방황하던 어느 날.

내가 동아리방으로 접근할 때 벤치 앞에 앉아있던 한 여자가 있었다.

자기 체구만 한 기타를 치던 그 사람은 나를 힐끗 보더니,

"너가 신입이구나?"

하고 다시 기타를 두들겼다.


그게 그 선배의 첫인상이었다.

이제는 완전히 잊혀졌지만, 난 한동안 그 선배와 비슷한 이름만 들어도 깜짝 놀랄 때가 있었다.

제대 후 우연히 복도를 지나갈 때 한 번 얼굴을 힐끗 본 것이 마지막이던 사람.


키가 작고 아담했던 그 선배는 본인이 훨씬 작은 체구임에도 늘 나를 어린 후배라고 챙겨주었다. 동아리 방에 가면 가끔 선배 혼자 기타를 치고 있었다. 나는 같이 기타를 치거나 옆에서 가만히 앉아 있곤 했다.


어느 여름 수련회, 집회가 끝나고 선배가 나를 불렀다.

수많은 사람들이 빠져나가는 그 시끄러운 와중에 선배는 목에 힘을 주며 말했다.

"나는 너가 더 성장하고 성숙하길 기도할게. 주님께서 네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길 축복해."

그러면서 책을 건네주는 선배의 눈이 글썽이는 것 같았다.


그 이후 선배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선배의 진심 어린 조언과 격려의 편지는 당시 내게 많은 힘이 되었던 것 같다.

어느 날 선배는 팀 리더를 맡을지 말지 고민이라고 말했다. 이것을 위해 저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은 지금도 그때에도 그렇게도 치열한 씨름이었다.

학교 앞 카페에서 나는 말했다. 선배의 고민은 손권의 탁자인 것 같아요. 맘 속으로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알면서도 그것을 망설이는... 손권이 탁자를 벤 것처럼, 선배도 탁자를 베야 해요.


주 : 삼국지 적벽대전에서 조조 군의 백만 대군이 쳐들어 올 때 오나라의 손권은 항복할지 전쟁할지 고심을 거듭하다, 최종적인 결단의 의미로 칼로 탁자를 베었다.


그렇게 우리는 약속을 했다. 선배는 팀 리더가 되고, 나도 열심히 팀 활동을 하기로.

그러나 선배와는 달리 난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동아리에서의 어떤 사건으로 인해 나는 탈퇴를 하게 되었다.


아직도 그때가 잊혀지지 않는다. 나와 친했던 나를 아끼고 사랑했던 그 사람들이 학교 잔디밭에 앉아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 선배가 이제는 팀 리더가 되어 나에게 소리치고 있었다. 너가 어떻게 나에게 이럴 수 있냐고.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눈 앞이 새하얗다는 것이 이런 느낌이었구나. 누가 잘못한 것일까. 나일까, 그일까, 우리 모두일까. 아니면 아무도 아닌 걸까.

난 정말이지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살다 보면 가끔 그런 일들이 생긴다. 생의 방향을 결정하는 큰 파장과 같은 일들이.

그렇게 완고했던 선배와 또 그만큼 어리석었던 나는 그 이후 다시는 마주칠 일이 없었다. 수년 전 결혼을 했다는 소식을 들은 것조차 가물거릴 정도로 전혀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그저 지금 언급하는 이유는,

그때 그 선배로 대변되는, 친했던 그 사람들을 나중에 어딘가에서 다시 볼 수 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드는 날이 있기 때문이다.

그때 우리가 분명 친했던 것들이, 영혼을 교감하고 가슴 깊이 사랑하며 신앙의 밑바닥 고민까지 허물없이 나누었던 그것들이, 지금은 고여 있던 자국조차 희미해져 가는 것은 어찌된 일일까.

페북으로 결혼했다 애 낳았다 어디서 일하며 무얼 하며 잘 산다 소식을 듣지만, 그저 휙 한 번 휘발되어 아무 감흥도 의미도 될 수 없는 지금의 내 모습이 너무나 슬퍼지는 것은 어찌된 까닭일까.


그런 사람들.

나를 사랑하고 실망하며 기대하고 원망하던, 그렇게 그리워하다가도 아무 느낌도 없이 그냥저냥 존재하다가, 전혀 생각은 나지 않지만 또 잊혀지지도 않는 그런 사람들.


누구 한 사람의 탓이라기엔 무색한 우리 인생들
시간은 흐르고 마음이 늙어서
눈물이 메말라 모든 게 끝날 때


나중에 정말 영원이란 것에 다다랐을 때,

당신과 내가 좋은 나라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당신과 내가 좋은 나라에서
그곳에서 만난다면
슬프던 지난 서로의 모습들을
까맣게 잊고 다시 인사할지도 몰라요

당신과 내가 좋은 나라에서
그 푸른 강가에서 만난다면
서로 하고프던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그냥 마주 보고 좋아서 웃기만 할 거예요

그 고운 무지개 속 물방울들처럼 행복한 거기로 들어가
아무 눈물 없이 슬픈 헤아림도 없이
그렇게 만날 수 있다면

- 좋은 나라, 시인과 촌장


배경음악 '좋은 나라' - 김도현 (시인과 촌장 곡)

https://youtu.be/0lSlaMbGHQ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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