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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거 Jang Apr 07. 2016

퇴사 후 일년


1.

한 달 전부터 야금야금 짐을 집에 가져간 덕분에 사무실에 남은 짐이 별로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마지막이 되니 은근히 챙길 게 남아 있었다.

B대리님이 주신 빨간 화분 꽃을 들고, 가방에 남은 책들과 자석 같은 것들을 담고 또 슬리퍼와 방석 같은 잡동사니들이 담긴 쇼핑백을 들고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상무님을 비롯한 사람들과는 이미 정신없이 인사를 끝마치고 J군과 D과장님이 마지막을 배웅해 주셨다.

미처 인사를 하지 못한 후배 K가 부랴부랴 뛰어왔다. 마지막으로 얼굴이라도 보고 나오니 마음이 덜 무거웠다.


피난 가듯 바리바리 짐을 싸 들고 일층 로비로 나가려니, 출입문 보안 담당자가 쳐다본다.


“저 오늘 퇴사라 사원증을 반납했는데요.”

그러자 그 보안 담당자는, 이제껏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온화한 미소로 말했다.


“제가 문을 열어 드리죠.”



출처 : 패밀리삼성



2.

퇴사한 지 벌써 일 년이다.

딱 일 년 전 이 날, 중앙문을 나설 때의 그 불안과 자유로움이 묘하게 공존하던 느낌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4월 초의 날씨는 하필 또 기가 막히게 따사로와 난 이게 정말 퇴사인지 봄 나들이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흔히 그렇듯, 입사 후 4년의 시간보다 퇴사 후 1년 동안 더 많은 일들이 있었다. 지난 일 년은 앞이 보이지 않는 터널 속에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더듬거리던 시간이었다.

‘도전과 실패’, ‘절망과 희망’과 같은 충분히 식상해진 단어들이, 전혀 식상하지 않게 되는 인생.  

'회사가 전쟁터라면 밖은 지옥'이라는 말을 한동안 참 많이 실감했다. 회사를 다닐 때 만난 퇴사한 동기가, 왜 퇴사를 만류했는지도 나와보니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어느 한편으로는 내게, '회사는 동물원이고 밖은 야생'이기도 했다. 안락한 동물원의 호랑이에서 야생의 토끼가 된 나는 매일 헐떡대며 뛰어다녔다. (그래서 주토피아를 보며 그렇게 감격했나 보다) 작은 일에도 더 많이 울고 웃고, 더 많이 감사하며 더 크게 좌절했다.


출처 : 주토피아


확실한 것은, 내게 세상은 에버랜드 동물원에서 사바나의 초원만큼 넓어졌다는 것이다.

출간 이후 인터뷰를 하고 독자들을 만나면서, 나 혼자만의 외로운 고민이 아니라는 것과, 각자 다양한 길로 도전하고 있다는 점은 적지 않은 위안이 되었다.   


'직장인의 난'이라는 (국내 최고의 직장인 코믹 애환) 팟캐스트에 게스트로 출연하여, MC 표범, 미녀, 마통님의 입담에 한참을 웃다 나왔다. 매주 토요일 아침마다 새로운 세상을 위해 시간을 쓴다는 것은 결코 작지 않은 일이었다.  


http://m.podbbang.com/ch/episode/8333?e=21918641



브런치 유명 작가이자 '프로들의 에버노트' 저자로 유명하신 홍순성 소장님과 너굴양님의 (요즘 가장 핫하게 뜨고 있는) '나는 1인 기업가다' 팟캐스트에도 초대받아, 1인 기업과 창직이라는 패러다임을 위해 치열하게 준비하시는 모습이 많은 귀감이 되었다.   


http://m.podbbang.com/ch/episode/10819?e=21921141



나보다 한 달 일찍 퇴사한 입사 동기인 J양은, '세상은 넓고 배우고 싶은 마음엔 끝이 없다'는 말을 페북에 남긴 채 매일 충만한 공부의 길을 걷고 있다. (또는 그렇게 보인다)


역시 회사 후배인 B군은 평소에 전시회 이야기만 하더니 시험을 준비하고 결국 훌쩍 런던으로 건너갔다. 예술문화 관련 회사에서 밤샘 작업을 하면서도 얼굴만은 싱글 방글하다.


사내벤처로 처음 스핀오프한 친구 H군과 팀원들 역시 다들 가정이 있는 몸이지만, 스타트업의 의기를 불태우며 새로운 길을 만들고 있다.

어느 분은 퇴사 후 그림을 그리며 전시회를 열고, 어느 분은 부부가 함께 퇴사하여 세계일주를 다니고 글을 쓰기도 한다.


입사 동기였던 P군이 결국 로스쿨에 진학했다. 그 소식을 듣고 난 몇 년 전 우리의 대화가 떠올랐다.  

딱 이맘때였을까. 그 날도 수많은 보고서와 야근에 시달리던 우리는 겨우 시간을 내어 만났다. 커피를 마시며 수원 디지털 시티 사내 공원을 산책하던 중 내가 물었다.


"야, 너는 나중에 뭐할 거냐?"

"난 요즘 로스쿨 쪽 알아보고 있는데, 공부할 시간이 없어 죽겠다. 너는?"

"나는 글 쓰고 싶어, 나중에 출판도 하고."


서로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가. 바쁘고 답답한 일상의 판타지처럼, 그렇게 우리는 툭 내뱉었는지도 모른다. 속으로는 '과연 그게 되겠어?'라고 생각하면서.  

그러나 몇 년 뒤, 결국 우리는 몇 번의 도전과 실패 끝에 - P군도 로스쿨 재수를 하고 나 역시 출간 거절을 당하며 - 당시의 농담 같던 말들이 현실이 되는 것을 보았다.   





3.

신입 시절 사수였던 부장님을 만났다.

20년 만에 처음 휴직을 하셨다는 부장님은, 매 순간순간 느끼는 게 많다고 하셨다. 왜 진작 이런 시간을 갖지 못했을까. 그동안 회사 안의 계획 중심으로 살아왔는데, 막상 밖으로 나와 직접 행동하니 수많은 일들이 발생하고 있다고.

최근에는 사모님과 JTBC 슈가맨 방청객도 다녀왔다고 하시는 즐거운 표정.

사십 대 중반, 부장님은 지금 이 순간이 가장 행복하다고 한다. 매일 새로운 자극과 깨달음을 얻고 있다는 부장님의 그 고백처럼, 나 역시 십 년 뒤에도 스스럼없이 웃으며 얘기할 수 있을까.    


이십 대의 고민, 삼십 대의 경험, 그리고 언젠가 꽃 피울 미래.  

우리에게 "내 순간"이 언제일까.


무언가를 감당할 수 있는 나이란 정해져 있는 걸까.

과거 또는 훗날,

어떤 조건을 달성했을 때, 완벽한 절정의 순간이라는 것이 있는 걸까.


비단 직장 생활이 아니더라도 우린 늘 영원한 미생처럼, 아직 미완의 아무것도 완결되지 않은,

어쩌면 미생이란 핑계로 그 어떤 순간도 온전히 누릴 수 없는,

그런 미진한 느낌들을 생의 순간순간 떼어내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늘 다음번 열차만을 기다리면서.


그러나

"영감님의 영광의 시대는 언제였죠?
난 지금입니다."
- 슬램덩크

라고 말하는 10대 후반의 강백호처럼,

나이에 상관없이 지금 이 순간을 직면해야 하는 때가 있다.




출처 : 슬램덩크


미루는 것과 기다리는 것은 다르다.

때론 흐트러지게 피어나는 밖의 꽃들보다도

새로 시작하는 일들과, 지금 내 옆에서 함께 일하는 사람들로 인해

사무실 안 지금 이 순간을 만끽하게 된다.

그리고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단순한 '동료(同僚)'에서 '동지(同志)'가 될 수 있다면 더 감사할 것이다.


요즘도 만나는 사람들마다 묻는다.

"왜 퇴사하셨어요?"

쉽지만 어려운 질문. 그럴 때마다 장황한 이유들을 생각했었는데, 일 년 쯤 지나니 이제는 좀 명쾌해지는 것 같다.

"재미가 없어서요."


아, 그냥 그랬던 거다-


흔히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한다.

이번 4월은 잘 일한 달이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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