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열>, <82년생 김지영>, <글쓰기의 최전선>
오랜만에 극장에서 영화 <박열>을 봤다. 나도 박열보다는 여주인공 가네코 후미코에게 더 눈길이 갔다. 박열의 시가 마음에 든다며 동거하자고 자신 있게 제안하는 여자, 박열이 자신에게 도모하는 일을 말해주지 않자 뺨을 후려치는 가네코 후미코의 모습에 어떻게 끌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가장 인상적인 모습은 바로 ‘읽고 쓰는’ 가네코 후미코였다. 감옥에 갇혀서도 끊임없이 자신에 대해 쓰는 후미코는 자서전을 2천장이나 썼다고 했다. 박열과 마지막으로 찍은 사진 속에서도 후미코는 책을 들었다. 가네코 후미코가 박열의 여자가 아니라 읽고 쓰는 여자였기에 오늘에도 주목받는 게 아닐까 싶다.
읽고 쓰는 일, 쉽지 않다. 후미코는 어려서 제대로 배우지 못해 더 읽고 쓰는 일에 매달렸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불우했던 어린 시절을 쓰면서 상처를 치유했으리라 짐작한다. 가네코 후미코의 그토록 당당한 모습은 바로 이런 과정을 거쳤기 때문일 거라 생각한다.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다고 해서 누구나 글쓰기를 하지는 않는다. 사실 글로 자신이 얼마나 불행한지를 쓰는 일은 더욱 고통스럽기 마련이다.
<글쓰기의 최전선>에서 작가 은유는 “고통의 글쓰기는 투쟁의 글쓰기다. 타인의 시선이 만들어 놓은 자아라는 환영과의 투쟁이고, 쓸 수 있는 가능성과 쓸 수 없는 가능성 사이의 투쟁이고, 매 순간 혼란과 초과의 자리에서 일어나는 말들을 취사선택하는 투쟁이다. 이 치열한 싸움을 치르고 나면, 비록 구차스러운 자기 주장 혹은 생에 대한 소심한 복수가 될지언정 의미 있다”고 했다. 나의 언어로 나의 삶의 서사를 풀어내는 쾌감, 그 후련함을 느낄 때 글쓰기로 상처를 치유하고 다시 살아가는 힘을 얻을 수 있다. 누구에게나 이런 글쓰기가 필요하지만 자신만의 언어를 갖지 못한 사회적 약자들에게 글쓰기가 꼭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무엇보다 여성들이 글쓰기에 나섰으면 좋겠다.
나는 ‘읽고 쓰는 여자’들이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노회찬 정의당 의원이 대통령에게 선물했다던 책 <82년생 김지영>을 나도 읽었다. 소설을 다 읽는 시간은 채 얼마 걸리지 않았는데 오래도록 답답했다. 나도 그렇고 내 친구들도 그렇고 수많은 여성들이 바로 ‘82년생 김지영’처럼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으니까. 너무나 보편적인 대한민국 여성의 모습이다. 여자로 태어났다고 차별받고(지금이야 딸을 더 좋아한다지만…), 학교나 사회에서 수많은 폭력적인 말과 행동에 별다른 저항 없이 살아가야 했던 우리들 모습. 결혼을 하면 가사와 육아를 감당하느라 또 자기를 내세우지 못하고 참아내는 수많은 여성들의 모습을 말이다.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숨죽여 울면서 자기 삶을 견뎌내고 있을지……. 이런 문제들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구조적인 문제라는 걸 알아야하지 않겠는가.
최근 여성 혐오에 대한 수많은 진단들이 쏟아진다. 여혐이 공론화되는 이유는 그래도 과거보다는 양성평등 인식이 많이 나아졌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래도 아직 절망적이다. 일례로 탁현민을 옹호하는 수많은 목소리들이 주류를 이루고, 탁현민이 물러나야 한다고 외치는 여성계의 목소리를 또 다른 여성 혐오로 만드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딸아이가 태어나고 ‘독박육아’에서 허우적대던 나는 수많은 문제들에 저항 아닌 짜증을 내며 어찌어찌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내 딸아이만큼은 이런 사회에서 살게 하고 싶지는 않다고 생각하니 고민이 커진다. 그래서 내가 떠올린 방법은 바로 읽고 쓰고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려운 일이지만 여자의 언어로, 고통을 겪어낸 몸을 통과한 언어로 자신의 삶의 문제를 쓰고 함께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소설 <82년생 김지영>의 가치도 여기에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우리에게 질문을 하게 하니까.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 걸까, 우리 딸들도 우리처럼 살아야 하는 걸까하는 질문들에 답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