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나, 그리고 칸트를 곁들인
고등학교를 다닐 때부터도 지독히 이과 쪽에 가깝던 나의 마음에도 와닿는 시들이 있었다. 물론 그것들도 아마 언어영역 공부하면서 접하게 된 것이겠지만.
당시엔 해석의 대상으로만 생각해서 다들 그랬듯이 글에 동그라미, 세모, 밑줄 긋기를 해대며 시의 특징, 성격, 화자의 의도 등을 찾아내는데 급급했었지만 유난히 마음에 들었던 시가 있다.
하나는 윤동주 시인의 <서시>, 다른 하나는 신석정 시인의 <들길에 서서>이다.
최근 19살 때 썼던 스터디 스케줄러를 발견하여 추억에 젖어 한 장 한 장 넘기다가 한 페이지에 삐뚤빼뚤 옮겨놓은 시 문구 일부를 보게 되었다. 팍팍한 고3의 마음에도 와닿았던 현대 서정시라니.
반갑기도 했지만, 가장 좋아했던 두 개의 시를 10년 가까이 지나 다시 읽고 나니 마음이 꽤 아팠다.
이 두 개 시의 주제는 ‘부끄러움 없는 삶에 대한 소망'과 '나의 이상 추구’였는데
지금의 나는, 그 의미가 담긴 구절에 가슴 뛰었을 19살의 어린 나 자신에게 참으로 실망스러운 어른이 되어 버렸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는 이 시들이 좋다.
들길에 서서
신석정
푸른 산이 흰 구름을 지니고 살 듯
내 머리 위에는 항상 푸른 하늘이 있다
하늘을 향하고 산림처럼 두 팔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숭고한 일이냐.
두 다리는 비록 연약하지만 젊은 산맥으로 삼고
부절히 움직인다는 둥근 지구를 밟았거니……
푸른 산처럼 든든하게 지구를 디디고 사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이냐
뼈에 저리도록 생활은 슬퍼도 좋다
저문 들길에 서서 푸른 별을 바라보자……
푸른 별을 바라보는 것은 하늘 아래 사는 거룩한 나의 일과이거니……
서시
윤동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친다.
대학원에 입학하고 이번 학기에 ‘윤리학’이라는 교과목을 신청해서 듣고 있다. 나에게는 꽤 어렵지만 공부해보고 싶었던 과목이었다. 이 수업에는 수강생이 그리 많지는 않아서 첫날에는 돌아가며 자기소개와 함께 이 과목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 짧게 얘기하는 시간이 있었다.
그땐 무슨 용기였는지 내 이야기를 다 털어놓았다.
“같이 수업 들으시는 분들이 불편해하실 수 있을 것 같아 먼저 사과드립니다. 사실 저는 마약 관련 전과가 있습니다. 이전까지는 저의 도덕적 판단이나 신념을 믿고 살아왔었는데 이 사건으로 인해 저에 대한 믿음이 많이 사라졌고, 앞으로 정직하게 도덕적으로 다시 살아가기 위해서는 윤리에 대해 많이 배우고 고민을 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하여 신청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뒤 수업 중 존 롤스의 '규범의 근거 지음을 대체한 정합설'에 대한 내용이 나왔다. 손을 들고 교수님께 질문을 했다. 마스크를 쓰고 있어 아무도 내 표정을 자세히 보지 못하셨겠지만, 사실 그때 나는 창피함 때문에 빨개진 얼굴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교수님, 질문이 있습니다. '도덕 판단자'라는 말이 나왔는데, 사회적 규범을 어긴 자에게도 그 판단 결정을 할 능력이나 자격이 부여될 수 있을까요?"
나 스스로에게 하는 질문이기도 했다.
30년 가까이 내가 유일하게 좋아했던 내 부분은 '스스로에게 떳떳한 나 자신'이었다. 그렇기에 대단치는 않지만 나의 가치관과 신념은 인생을 지탱해 주었었다.
그러나 잘못된 짓을 저지른 순간 내가 유일하게 좋아하던 내가 사라져 버리고, 나의 근간마저 흔들리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내 가치관과 신념은 잘못된 것이었나? 반대의 것이니까 이 부분만 배제할 수가 있나? 내가 직접 어겼다면 그걸 내 신념이라 할 수 있나? 애초에 내 것이 아니라 이상향일 뿐이었나?' 등등 참 많은 생각들을 했었고 지금까지도 하고 있는데, 아직 답은 찾지 못했다.
앞서 '좋아하는 내 모습을 잃었다.'라고 한 것과 별개로 나는 대게 사람을 좋아하는 편이다. 그 사람의 좋은 점 때문에 좋아하게 되는 경우도 있고, 반대로 그 사람이 좋아서 좋아하는 점을 찾게 되는 경우가 있다. (물론 내가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을 제외하고.)
요즘에는 종종 나 자신은 좋아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은 좋아하는 게 모순이라고 느낄 때가 있다.
그렇다면, '스스로 좋아하는 부분에 차순위의 것은 없었나? 좋아할 법한 부분을 다시 만들어 보는 건 어떨까? 나에 대한 허들을 너무 높게 두고 있나? 어쩌면 내가 나를 좋아하는 건 시기상조일까? 이런 내 속마음을 들켜 가까운 내 사람들이 날 좋아하지 않으면 어떡하지?' 또 혼자서 한참 고민한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인생은 고민의 반복이다.
가치관과 신념은 이렇게 됐다 쳐도 취향은 그대로 인가보다. 최근 윤리학 수업을 같이 듣는 선배님으로부터 들은 구절이 또 마음에 들어 메모해 두었었다.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말이다.
“Two things fill the mind with ever new and increasing admiration and awe, the more often and steadily we reflect upon them: the starry heavens above me and the moral law within me.”*
'점점 커져가는 경이로움과 경외심으로 마음을 채우게 하고 계속해서 우리를 성찰하게끔 하는 두 가지가 있다. 그것은 바로, 내 위에서 빛나는 하늘과 내 안의 도덕 법률이다.'(본인 의역)
칸트의 저서에서 언급한 '별이 빛나는 하늘'은 앞서 얘기한 우리나라 두 시인의 시 속 ‘별’의 의미와는 다르게 자연과학과 세계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조금 차이가 있지만, 결국 단락 전체의 의미는 일맥상통하다고 본다. 나의 중심이 되는 것을 찾을 것, 지킬 것, 그리고 포기하지 말 것.
나에게 던진 질문들의 답은 언젠가 나 스스로 찾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나를 사랑할 것이다.
지금은 땅을 디디고 서서 내 마음속에 작지만 별 같은 걸 품고, 주어진 길을 걸어갈 것이다.
가끔은 멈춰 서서 푸른 별을 바라보면서……
*박경남 <묘비명 비문_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 포럼, 2009 (네이버지식백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