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의 진주를 꿰는 시간

<토지> 속 주변 인물이 무대에 오르는 것을 보며 기록합니다

by 날개 달 천사

“실이 열 꾸리라도 비단이 돼야제요.”

“비단이 안 되면 실로 쓰고, 어렵잖여.”

“하기는 이가 없으면 잇몸이 이 노릇 한다 캅디다만.”


가난한 살림살이 속에서도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며 서로를 버티게 했습니다. 무언가 ‘제 몫의 쓰임’이 있어야 한다는 믿음, 그 말 한마디가 오래 마음에 남았습니다.




짝쇠는 힘이 세고, 말은 어눌하지만, 사람들 틈에서 늘 한 발 비켜 서 있는 인물입니다. 가끔 헤프기 짝이 없는 웃음만 띠고 있는 그도 만세 운동의 군중들 선두에 서서 춤추듯 만세를 부르짖습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그는 말합니다.

“그거사 머, 그거사, 한 사람쯤은 들어가야 안 하겄십니까.” 그렇게 짝쇠는 옥살이하고 돌아옵니다.

가장 낮은 곳에 있던 이가 그 순간 ‘자기 몫의 자리’를 몸으로 선택하고, 그만의 숭고함으로 제 역할을 해냈어요.




백로 떼 속에 섞이지 못한 외로운 까마귀처럼, 긴 세월을 가슴에 시퍼런 멍을 안고 살아온 한복이. ‘살인자의 자식’이란 끈적한 고약 같은 주홍 글씨를 품고 숨죽여 지낸 그도 군자금을 전하는 밀령을 받습니다. 그리고 흐느껴 웁니다. 이름 없는 존재로 사라질 줄 알았던 자기 삶도 누군가에게, 그리고 이 나라에 ‘긴요한 쓰임’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만감이 교차했을 겁니다.




짝쇠와 한복이를 보며 제 안의 질문으로 되돌아옵니다. ‘나는 지금, 내 몫의 자리를 살고 있나?’

사람은 저마다 존재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개똥도 약에 쓰이듯, 태어난 이상 누구나 제 몫의 등불 하나는 켜고 떠나기 마련이니까요.

연말 연초가 되면 1년을 돌아보고 내년을 계획할 때 ‘나는 뭘 했나.’ 자문하며 생각 갈피를 더듬습니다. 내 삶의 실꾸리가 제대로 풀리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은 본능적인 의식일지도 모릅니다.

밥값은 하고 살았는지, 밥값은 할 만큼 되는지 바구니에 담긴 실꾸리를 한 올씩 엮어 봅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지요. 이 속담을 떠올리면 늘 구슬을 빼닮은 진주가 떠오릅니다.

그렁그렁 눈물방울이 연상되는 진주는 그 탄생에 아픔이 수반된 보석입니다. 고통이 승화된 애달픈 보석이지요.

이미 존재 자체로도 충분한 이유가 되지만 고이 꿰어내면 여느 보석 못지않은 고귀한 장신구가 됩니다. 단아하면서도 수줍어 보이는 진주는 고요한 아름다움이 더 빛나는 보석이에요.

그래서 유독 저는 진주 장신구가 많습니다. 주로 눈길도 진주에게로 향하고요. 애가 많고 한이 서려 있는 그 탄생의 비밀과 눈물 많은 저를 닮은 그 모양새에 정이 더 가나 봅니다.



아파도 소리 낼 수 없고, 슬퍼도 맘껏 울지 못하는 이들은 살아가는 이유를 알고 싶어합니다. 소복하게 담겨 있는 바구니 속 실꾸리만으로도 충분하지만, 그렇게 살다 떠나긴 너무 아쉬운 인생이지요. 한 번쯤은 바늘에 한 번 코를 꿰어 보고 싶고 옷을 한 번 기워 보고 싶습니다.

눈물 같은 진주도 좋고 매끈한 비단실이어도 괜찮지만, 꿰어야 보배이듯 이왕이면 ‘답게’ 살아보고 싶습니다. 앉은 자리에서가 아닌 나의 무대 위에서 말이지요.


그래서 저는, 바구니를 박차고 나온 짝쇠와 한복이에게 고운 명주실로 자아낸 옷 한 번씩 입혀 주고 싶습니다. 누구나 한 번쯤은, 자기 몫의 쓰임으로 자기 이름을 증명하는 순간이 필요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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