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논문일기

텍스트와 실재

속아서는 안 되는 거짓말

by 서수

글에만 파묻혀 있다 보면 자주 현실감각이 떨어지고 있음을 발견한다. 사람들과 마주치는 것을 피한다든지, 대화를 할 때 상대방과 주고받는 상호작용이 아니라 어느 순간부터 내 얘기만(주로 논문과 관련된) 하고 있다든지, 사회생활에 길들여져 주변 인간관계와 처세술에 능한 유들유들했던 성격이 내 의견과 생각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뒷받침하는 데에 더 강화된 성격으로 변해 있다든지 등등. 하지만 이런 변화는 긍정적인 부분도 크다. 너무 상대방에게 맞추려고 하고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보던 과거의 성격이, 좀 더 나에게 집중하고 나의 내면의 목소리를 바깥으로 표출할 수 있는 소신 있는 성격으로 어느 정도 옮겨 갔기 때문이다.


지난 편에서 잠시 언급했듯이 내 안에 머물기만 했던 실체 모를 어떤 것들을 정리된 언어로, 텍스트로 쓰고 말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는 것은 실로 엄청난 일이다. 내가 만난 철학자를 통해, 그의 도움을 통해 나도 텍스트로 말하고 쓸 수 있는 방법을 배웠고, 이는 나 자신과 세상을 뜬구름 잡는 식이 아니라 좀 더 구체적이고도 날카롭게 분석할 수 있는 힘이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아직 자신의 언어를 갖지 못한 사람들을 기억하고, 그들의 상황을 대신 언어로 말해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도.


나는 텍스트를, 분명히 존재하지만 멈춰 있지 않고 늘 흐르고 있는 상태의 유동적인 '실재'를 언어로 '정박'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여 실재는 자신을 정박시킬 텍스트를 필요로 하고, 텍스트 역시 자신이 발화할 수 있게 실질적인 내용이 되어 주는 실재를 필요로 한다. 우리가 보고 듣는 것은 바로 이 텍스트이지만, 이 텍스트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 텍스트의 바깥에는 늘 다른 무언가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텍스트든 예술작품이든 감각적인 형태로 발화되고 현현되길 기다리고 있는 어떤 것들이.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우리는 텍스트에 속기 쉽다. 이 텍스트는 존재하고 있는 현실을 반영하고 있지만 마치 텍스트가 현실을 '곧이 곧대로' 반영하는 있는 것처럼, 텍스트'만'이 현실을 반영할 수 있는 것처럼, 혹은 텍스트가 말하고 있지 않은 것들은 존재하고 있지 않으며 주목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텍스트의 안과 밖에 있는 모든 맥락을 무시한 채 이 텍스트 자체가 현실과 동일시되어버리는 것이다. 유동하는 실재를 한번 정박시켜버린 텍스트는 마치 그것이 실재의 전부를 대변하는 양 오만해져 버린다. 그리하여 텍스트의 덫에 걸린 사람은 쉽게 벗어날 수 없다. 그 바깥을 보려면 타인이 개입해야 하는데, 닫혀 있는 나를 찢고 들어오는 타인의 개입을 처음부터 좋아하고 반기는 사람은 거의 없기에 이 과정은 격렬한 혁명 혹은 전쟁과 같다.

텍스트의 거짓말에 속는 가장 최후의 단계인 텍스트의 '신화화'는 그렇기에 무서운 것인데, 이는 어떤 생각과 습관이 '사상'으로 정박되어 버리는 것이다. 실재 그 자체는 중의적이고 열려 있는 상태이지만 그것을 신화화하여 국가의 수립을 목적으로 사용한다든지, 어떤 공동체의 우월함과 이익을 위해 사용한다든지, 전쟁을 위한 수단으로 혹은 타인을 해치는 수단으로 악용한다든지 하게 되면 이는 곧바로 텍스트로 굳어져 더 이상 변화시킬 수 없는 고체가 되어 버린다. 이에 대해 우리는 역사적으로도, 지금 이 순간에도 너무도 많은 끔찍한 사례들을 경험해 왔다. 이것, 일의적인 의미로 굳어진 텍스트는 우리 머릿속이 아니라 바로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을, 그리고 나를 실존적으로 위협한다는 것, 이 사실이 중요하다. 텍스트는 텍스트로 끝나지 않고 실제로 내 목숨을 위협하는 무기가 되어 돌아온다. 그 바깥을 읽지 못한다면 말이다.


나는 논문을 쓰면서 나 스스로가 텍스트에 속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만 했다. 온통 말과 글이, 언어가 난무하는 이 논문의 세계에서 어떤 형태로든 실재를 무시하지 않기 위해, 언어화되지 않은 텍스트의 바깥을 감각적으로 느끼기 위해 노력했다. 그것은 광화문에 나가는 것, 노란 리본을 다는 것,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 등이었다.


여담이지만 나는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이 무리 앞에서는 비유로만 말씀하시고 나중에 제자들에게 따로 비유를 풀어 설명하신 행위가 바로 이 점에서 이해가 되었다. 그는 인간을 너무 잘 아셨던 것이다. 자신이 발화한 그 텍스트가 '곧이 곧대로' 일의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지지 않도록, 율법을 신봉했던 바리새인들처럼 텍스트 자체가 우상이 되어버리지 않게 하시기 위해 비유라는 문학적 방식을 통해 사람들로 하여금 텍스트 바깥의 실재를 감각할 수 있도록 말씀하신 것은 아니신지('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물론 이것은 전혀 신학적이지 않은 나의 짧은 생각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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