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겐 가장 잘 보이는 너의 문제
가끔은 나도 선배랍시고 오지랖을 떨 때가 있다. 그건 주로 논문을 준비하고 있는 석사 후배들이 생각처럼 논문이 풀리지 않아 나에게 조언을 구하러 올 때이다.
내 논문도 제대로 쓰고 있지 못한 주제에 남의 논문에 대해 가타부타하는 것이 주제넘은 짓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내 논문이 아니기 때문에 더 객관적으로 분석해줄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논문에 대해 어떤 부분이 논리적으로 빈약하고 목차 구성에 있어서 부족한지 말해주다 보면 내가 고심했던 내 논문의 문제를 깨닫게 되는 경우도 많다.
물론 관건은 타인의 조언을 진심으로 수용하느냐 한 귀로 듣고 흘리느냐 하는 것이지만 말이다.
후배 A는 나보다 대학원에 늦게 입학했지만 내가 취업이 돼서 학교를 떠나 있는 동안 열심히 공부해서 나보다 한 학기 먼저 논문 심사에 들어갈 예정이었다. 학번으로는 후배였어도 논문으로는 선배였던 셈이다. 한 학기 차이지만 그래도 함께 논문을 준비하는 동료가 있다는 것은 서로에게 행운이었다. 우리는 서로 답답한 일이 있으면 함께 바람을 쐬러 나가기도 하고, 학생식당 대신 커피나 샌드위치를 사 먹기도 했다. 그리고 교수님께 논문을 지도 받고 난 뒤나, 같은 전공의 박사/석사 과정생 앞에서 논문 프로포절을 발표하고 난 뒤에는 따로 만나서 맥주를 마시며 회포를 풀기도 했다.
후배 A의 논문 주제는 내가 잘 모르는 내용이기도 했지만 그 방법론이 내 것과는 정반대여서 사실 나는 그의 글을 잘 이해하지는 못했다. 그가 선택한 방법론은 소위 우리가 '영미 미학'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20세기 이후 영국과 미국에서 시작된 분석철학에 기반한 것이었다. 분석철학은 철학적 개념이나 명제, 이론 등의 언어적 구조와 형식을 분석하고 해명하는 것으로, 독일이나 프랑스 등에서 시작된 대륙 철학이 형이상학적 전통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과는 상반된다. 나의 논문은 프랑스 미학을 토대로 하고 있으므로 영미 미학을 기반으로 한 그의 논문의 주제와 구성은 나에게 매우 낯선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같은 영미 미학을 방법론으로 선택한 선배들에게 많은 조언을 구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그가 쓴 요약문을 읽고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을 체크해주는 정도였다. 왜 여기에서 갑자기 저기로 내용이 흘러가는지 모르겠다든지, 그래서 이 논문에서 네가 하고 싶어 하는 말이 영미 미학의 전통 속에서 타당한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는 것인지 등등 정도를 말이다. 간단해서 무용해 보이기까지 한 조언이었지만 어쨌든 논문 심사에서 심사위원들을 설득시키기 위해서는 나 같은 사람도 설득을 시키긴 해야 한다. 논문은 어려운 글이지만 그 어렵고 난해하고 방대한 글의 핵심은 사실상 단 세 문장으로도 요약될 수 있기 때문이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삼단논법과 같은 이 단순한 세 문장은 교수님들은 물론이거니와 학생들까지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후배 B는 나보다 1년 뒤에 대학원에 입학한 후배였고, 내가 논문 심사를 준비할 때 프로포절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의 주제는 뇌과학의 발전에 따라 새로이 등장한 '신경미학'에 관한 것이었다. 인체의 장기 중에 가장 마지막까지 신비의 영역으로 남아 있던 뇌를 정밀하게 분석하고 뇌의 기능과 작용을 파악할 수 있는 장비들이 발명됨에 따라 뇌과학은 이공계뿐 아니라 인문계에서도 핫한 학문이 되었다. 특히 예술을 이론적으로 다루는 미학의 영역에서 뇌과학은 인간의 감각들이 신경세포를 통해 뇌에 어떻게 전달되고 뇌의 어느 부분에서 이 감각들을 주관하는지 말해줄 수 있으며 이에 따라 철학의 전통에서 감각, 감성, 미, 예술적 창조 행위 등의 주제들이 관념적으로 다뤄져 온 것과 반대로, 이제는 이러한 주제들이 과학적으로 증명될 수 있는 계기들을 배출해낸 것이다.
이 주제는 지도교수님이 나 포함 여러 학생들에게 추천해주셨던 거라 나름 여기저기 손을 타긴 했지만 그중 누구도 덥석 물어가진 않았었다. 다들 뇌과학에는 별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었거나, 스스로 결정한 주제가 확고하게 있었기 때문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거절한 이 주제는 최종적으로 그에게 선택되었다. 그는 매우 열정이 있었고 이 주제에 대해 누구보다도 자부심이 있던 학생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등장한 지 꽤 된 뇌과학이라는 학문을 우리 학과의 석사학위논문에 접목시킨 사례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는 교수님이 추천해주신 논문 주제에다가 신경미학이라는 새로운 주제로 학위논문을 쓴다면 논문 심사가 조금 더 수월해질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논문은 항상 우리의 예상을 벗어난다. 비교적 최신 주제를 선택한 그의 참고문헌들은 대부분 2000년대 이후 발행된 것들이었으며 당연한 얘기지만 모두 과학적인 실험을 바탕으로 한 짧은 논문들이었다. 이 논문들은 이공분야의 틀에 맞게 기존의 연구내용들을 요약한 뒤 가설을 정하고 이 가설에 맞는 실험을 어떤 식으로 설계했는지, 그렇게 실험을 했더니 그들의 가설이 증명되었는지 아니었는지 등의 형식으로 서술되었다. 문제는 그가 인문학 논문에 그 형식을 가져왔다는 점이었고, 이에 프로포절을 발표하는 족족 교수님과 박사 선생님들께 많은 지적을 받았다. 후배 A의 논문과 마찬가지로 나는 후배 B의 주제에 대해 이해가 부족했으므로 내가 해줄 수 있는 조언은 좀 더 우리 과 논문의 전통에 맞게 그 형식을 수정하라는 것과, 이 논문이 비록 과학적인 실험을 바탕으로 했다고 해도 그 내용이 결국은 미학의 역사적인 주제 안에서 어떤 위치를 점하고 있는지 아니면 그들이 설정한 가설들이 미학의 영역 안에서 합당한 지에 대한 내용을 추가하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더불어 이 과학자들이 가설을 설정함에 있어 미학의 이해에 대해 범하고 있는 실수를 미학의 다른 이론으로 보완할 수 있는지를 말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라는 것도.
두 후배들에게 조언을 해주면서 나 역시 내 논문의 문제점을 다시 발견하고 수정할 수 있었다. 가장 먼저는 내가 내 논문에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를 대전제-소전제-결론의 세 문장으로 요약할 것. 이 틀이 방대한 내용의 논문 속에서 흔들리고 유실되지 않도록 잘 지켜내는 것. 그리고 석사학위논문에 무리하게 욕심을 부려 감당하지도 못할 목차를 구성하지 않도록 늘 절제할 것.(나는 하마터면 '공동체'와 관련된 모든 철학자들의 이론을 서론에서 요약할 뻔했다)
사실 석사학위 수준의 논문에 있어 가장 무서운 적은 자존심이다. 나의 자존심 때문에 누군가에게 물어보지 않는 것, 나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자신감에 취해 누군가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 것. 우리 모두에게는 타인이 필요하다. 우리는 타인에게로 열려 있는 존재들이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