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은 꼭 써야 하는 것일까?
논문을 쓰다 보면 가끔씩 근본적인 물음이 내 안에서 올라온다. "과연 논문을 꼭 써야 할까?"
사실 나에게는 한 번의 전과가 있다.
실제 범죄 전과가 아니라, 코스웍을 마치고 논문 쓰기에 돌입할 즈음에 취업을 해서 학교를 1년 6개월가량 떠났던 것이다. 논문 주제를 잡는답시고 코스웍 이후 1년을 허송세월로 보내면서 내 안과 밖에서 많은 갈등의 요소들이 있었다. 물론 가장 중요한 요소는 돈이었다.
이 당시에 이미 내 나이는 29살이었고, 만약 어디라도 취업을 해야 한다면 지금 밖에는 시간이 없었다. '대한민국' 어느 직장에서 대학원 수료에 나이 서른인 '여성'을 신입직원으로 채용할 것인가. 어쨌든 20대의 마지막에 접어들자 엄청난 불안감과 압박이 나에게 몰아쳐 왔다. 1년이 됐든 2년이 됐든 앞이 안 보이는 논문을 계속 붙잡고 있을 것인가, 아니면 일단 어디라도 들어가서 돈을 벌 것인가. 나는 이 전공으로 박사를 갈 것도 아니고, 교수가 목표도 아니었다. 나는 석사학위를 따고 나서 직장에 들어가서 돈을 벌 계획이었는데 어영부영 시간이 흘러버리자 이제 급한 건 논문이 아니라 취업이 된 것이다.
쫓기듯이 준비한 취업에서 운이 좋게도 한 군데 회사에 최종 합격을 했고, 29살 늦은 나이에 신입사원으로 입사하게 되었다. 교수님께는 최대한 정중하게 말씀드렸는데 이미 과거에 직장을 다니느라 학교를 잠시 떠나게 된 선배들도 여럿 있었기에 교수님께는 익숙한 그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시 학교로 돌아온 뒤에 한 선배에게 듣기로는 교수님께서는 내가 논문을 안 쓰고 나갈 줄은 예상하지 못하셨다며 적잖이 놀라셨다고 한다. 지도교수님께는 늘 죄송한 마음이다.
정규직으로 취업을 하고 돈을 벌게 되니 그다음에 날 기다리고 있던 것은 결혼이었다. 당시 오래 사귄 남자 친구(현 남편)가 있었고 남자 친구도 직장에 들어가게 되어 우리는 결혼 자금을 모을 수 있었고 결혼을 하게 되었다. 만약 내가 계속 논문을 쓰고 있는 학생이었다면? 아마 내 졸업 전에는 결혼을 결코 하지 못했을 것이다. 돈도 돈이지만, 논문 주제조차 없는 상태에서 결혼을 하고 신혼생활을 하면 멀티 플레이가 안 되는 나로서는 공부와 신혼을 감당하지 못했을 것이다.
내 성격도 문제이지만 이 공부 자체가 중간에 다른 것을 하면서 집중하기가 결코 쉽지 않다. 코스웍에는 다들 알바도 하고, 운동도 하고, 논문을 위한 외국어도 따로 배우면서 학교를 다니지만 코스웍을 수료하고 본격적인 논문 모드로 돌입하고부터는 아침부터 밤까지 연구실 책상에 앉아 죽어라 텍스트 리딩을 하고 생각을 정리한다. 수도승처럼 일상과 단절된 채 오로지 공부만 한다. 그나마 엉덩이를 떼고 '나 아닌'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는 시간은 점심, 저녁식사 시간 정도와 도서관에 책을 대출하고 반납하러 가는 시간 정도이다. 그러니 직장 생활과 병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논문과 취업 사이에서 일단 취업을 선택한 나는 학교를 오래 떠나 있었고, 가끔씩 논문을 완성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럴 때마다 자꾸 뒤를 돌아보는 것 같아서 앞만 보고 가자며 나를 다독였다. '그래, 내 인생에 논문은 원래부터 없었던 거야.'
그런데 너무 신기하고 이상한 것은 직장생활을 하면 할수록 석사를 마치지 못했다는 그 찝찝함과 나 자신에 대한 한심함과 미련이 갈수록 커지는 것이었다. 나는 돈을 벌기 시작하면 따박따박 나오는 월급에 취해 다시는 대학원 생활로 돌아가기 싫을 줄 알았다. 게다가 자격지심인 것인지 업무상 만나는 사람들이 나와 비슷한 연령에 비슷한 전공의 석사학위 소지자라면 너무 부러웠다. 이 사람은 늦지 않게 논문도 쓰고 일도 하고, 딱 내가 바라던 모습대로 사는구나. 뿐 아니라 업무에 필요한 지루한 글쓰기만 하고 있자니 창조적인 글쓰기에 대한 열망이 그 지루함에 반비례하며 커져만 갔다. 논문을 위한 글쓰기는 고통스럽긴 하지만 결국은 내 안에 있는 이야기를 나의 언어로 끄집어내는 창조적인 행위였던 것이다. 반대로 업무용 글쓰기는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이었다. 똑같은 내용을 비슷한 단어로만 대체하는.
이렇게 평생 후회만 하고 살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학교를 떠나고 정확히 1년 6개월 뒤, 퇴사를 하고 교수님께 장문의 메일로 면담 신청을 한 뒤 학교로 가는 마을버스를 타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그리고 또 생각한다. '내가 지금 도대체 뭐 하고 있는 거지?' 내 발로 나온 학교에 내 발로 다시 들어가는 이상한 기분. 지금 떠올려봐도 그때의 기분을 정확한 언어로 설명하기란 힘들다. 그냥 시트콤의 한 장면 같았달까.
학교에 다시 들어와서 논문을 쓰면서 '논문, 꼭 써야 할까?'라는 물음이 내 안에 이제는 떠오르지 않을 줄 알았다. 퇴사까지 하면서 다시 쓰기로 했으면, 그리고 사람이 양심이라는 것이 있다면 말이다. 하지만 또 사람이기에 여전히 근본적인 물음이 내 안에서 올라온다. "과연 논문을 꼭 써야 할까?", "내 삶에서 이 논문이 과연 그렇게 중요할까?"
한 가지 달라진 점이 있다면 다음과 같다. 예전에는 이 물음에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쉽게 흔들렸다. 하지만 한번 이 흔들리는 마음에 쉽게 학교를 나갔다가 다시 들어온 뒤로는 이 물음에 확실하게 답할 수 있다. 논문, 꼭 써야 한다. 중간에 그만두는 일은 후회와 미련만 낳는다. 그럴 바에야 몇 년 고생해서 쓰고 떳떳하게 졸업하는 것이 '정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