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수 Mar 25. 2021

개는 무조건 사랑만 주는 줄 알았어

그 눈빛을 보기 전까지는.

험블이가 커 갈수록 제리가 짖는 횟수가 더 많아졌다. 험블이가 누워 있거나 기어 다니기만 할 줄 알았던 아기 시절에는 제리도 자기 딴에는 험블이를 지킨다고 짖었었다면 이제 험블이가 뛰어다니기 시작하면서 제리를 성가시게 하다 보니 예민해진 제리는 더 크고 더 자주 짖었다. 그럴수록 제리에 대한 우리의 잔소리와 훈육과 야단도 눈에 띄게 잦아졌다. 

제리의 짖는 소리가 어마어마하게 크다 보니 나와 남편은 제리의 눈치를 엄청 봤다. 밤에 모두 잠이 들어 조용한 시간에 짖을까 봐 우리는 화장실을 가는 것도 진짜 조심조심 갔고, 혹여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제리가 짖을까 봐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심지어는 밤에 화장실을 가고 싶어도 제리가 깰까 봐 한참을 앉아서 고민하다가 가는 것이 습관이 되어 버렸다. 나와 남편 둘 중 한 명이 저녁 약속이 있어서 험블이가 잠든 시간에 들어올 때는 서로 도착하는 시간에 맞춰 카톡을 했고, 현관문 앞에서는 카톡으로 문을 열어달라고 한 뒤 집에 있는 사람이 제리를 안고 나서야 다른 한 명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식이었다. 만약 현관문 앞에 있는데 집 안에 있는 사람이 카톡을 안 보고 있으면 밖에 있는 사람이 카톡을 볼 때까지 기다렸다가 들어왔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문 여는 소리에 제리가 왈왈왈왈- 하고 짖어버리기 때문이다. 그 소리에 험블이만 깨면 문제가 안되는데, 윗 집과 아랫 집도 다 자는 시간이라 엄청난 민폐가 되어 버린다. 

그래서 나와 남편은 제리의 짖는 소리가 너무 스트레스였고, 그 소리에 점점 더 히스테릭하게 반응하게 되었다. 게다가 험블이도 이제는 제리가 짖을 때 가슴을 부여잡고 놀라 버려서, 험블이를 위해서도 제리를 더 강하게 훈육하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그렇게 한다고 해서 제리의 행동이 교정되지는 않았고 오히려 더 심해지는 듯했다. 

그러다 무시무시한 한파가 밀어닥쳤던 지난 2월에 제리가 산책을 하다가 조금 뛰었는데 너무 추워서인지 다리 근육이 놀라서 슬개골 수술을 했던 다리를 다시 절기 시작했다. 다시 슬개골이 빠진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다. 제리는 다리가 아파서 더 예민해졌고, 자기를 보살펴달라고 우리에게 더 달라붙었다. 하지만 우리는 제리를 더 잘 케어해 주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제리가 짖을 때마다 참지 못하고 화를 내게 되었다. 그래서일까, 그날 밤부터 제리가 달라졌다. 

원래 험블이와 우리가 거실에서 놀 때 제리는 자기랑도 놀아달라고 인형을 물고 오거나 나나 남편 옆에 착 달라붙어 있었다. 우리가 거실에서 다른 방으로 이동할 때도 따라왔고, 잠을 잘 때는 우리 옆에 몸을 포개고 자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날부터 제리는 우리가 거실에 있을 때 혼자 불이 꺼져있는 다른 방에 가서 똬리를 틀고 엎드려 있었고, 우리가 이름을 불러도 반응하지 않았다. 잠을 잘 때도 우리 침대에 올라오지 않고, 아니 아예 침실에 들어오지도 않고 혼자 거실에 앉아 있었다. 침대로 올라오라고 불러도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내가 억지로 제리를 들고 와서 침대에 올려놓았을 때 제리의 눈빛을 보았는데, 생전 처음 보는 눈빛이었다. 슬프고 공허한 눈빛, 그 눈빛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나, 너네한테 실망했어."

그 눈빛을 보는 순간 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남편은 버릇처럼 개는 주인을 평생 사랑한다고, 사랑하는 것 외에는 할 줄 모른다고 말하곤 했는데 그 말을 너무 안일하게 믿고 있었던 걸까. 제리가 더 이상 우리를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그동안 우리가 험블이를 키운다고 제리에게 너무 신경을 쓰지 않았고, 같은 자식인데도 제리를 너무 심하게 홀대해왔던 것이다. 이게 하루 이틀 쌓이고 쌓여서 제리에게 너무도 큰 상처가 되었고, 지금 그 상처 입은 모습을 우리에게 보인 것이었다. 

그 날로 우리는 제리에게 진심으로 사과를 하고, 다시는 혼내지 않겠다고 약속을 했다. 바로 다음 날 남편은 닭가슴살과 황태로 제리에게 (2년 만에) 보양식을 해 주었고, 나는 제리를 안고 사랑한다는 말을 계속 해 주었다. 며칠을 지극정성으로 제리를 케어하자 다시 예전의 눈빛으로 돌아왔다. 그때 나는 확실히 느꼈던 것 같다, 개는 주인에게 사랑만 주는 기계가 아니라고. 혹여 사랑만 주는 존재라고 하더라도 절대 함부로 상처 줘서는 안 될 존재라고. 나는 아마 그 눈빛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개를 애보다 사랑했던 시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