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과연 졸업할 수 있을까?
봄이 오고 새 학기가 시작된다.
방학에는 차라리 괜찮다. 교정에도 연구실에도 학생들이 별로 없어서 공부에 집중하기 좋은 차분한 환경이고, 학생식당에 혼자 가도 그다지 민망하지 않다. 도서관에도 사람이 없으니 책도 예약 없이 금방 빌릴 수 있다.
그런데 학기가 시작되면 분위기가 달라진다. 일단 학부와 대학원에 신입생들이 들어오고, 복학생들이 돌아온다. 차분한 분위기는 온데간데 없고 북적북적해지고 생기가 돌며 학부생들의 막걸리판이 벌어진다. 적막하던 연구실에도 새로운 얼굴들이 보이고, 방학 내내 보이지 않던 얼굴들도 새학기와 더불어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학기의 시작은 곧 논문 심사의 시작이기도 하다.
논문 심사는 논문자격시험을 치르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봄 학기에는 3월에 시험이 있으니 학기가 시작되자마자 논문 심사에 돌입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지도교수님과 졸업에 대한 커뮤니케이션은 그 전에 이미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석사학위심사를 위한 자격시험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다만 그 시험을 치르기 위해서는 논문이 어느 정도 완성되어 있어야 하고 교수님과도 합의가 이루어져 있어야 하는데 이 과정이 더디고 고될 뿐이다.
내가 회사를 퇴사하고 학교를 다시 온 것이 1월 경이었으니 3월에 바로 논문 심사를 들어갈 수 있을리는 만무하고, 봄 날씨와 새학기가 가져다주는 알싸한 긴장감이 감도는 연구실의 분위기를 살피면서 내가 취업을 하고 나가 있는 동안 열심히 논문을 준비한 나의 석사 동기들이 논문 심사를 준비하는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며 응원을 해 줄 뿐이었다.
그들이 논문 심사를 앞두고 있다는 것은 석사 연구실에 있는 한 대의 프린터가 쉴새없이 인쇄를 하면서 내는 기계 소리로 알 수 있다. 교수님께 드릴 논문 초고, 같은 지도교수님 밑에 있는 박사 선배들, 석사 수료생들, 석사 과정생들에게 보여줄 논문 요약문들을 출력하는 것이다. 3월에 논문자격시험을 통과하면 지도교수님의 서명이 포함된 논문심사원을 학과 사무실에 제출해야 하고, 5월에 있을 본 심사를 위해 학생들은 4월에는 지도교수님과 선후배들 앞에서 예비 심사를 치른다. 본 심사처럼 시간을 정해 요약문을 발표하고, 발표 이후에는 질문을 받고 대답을 한다. 그리고 선후배들에게 크리틱을 받으면서 미진한 부분을 수정해 나간다.
일단 학기가 시작되면 이런 과정이 순식간에 진행되기 때문에 논문 초고는 이미 그 전에 90% 이상은 작성이 되어 있어야 한다. 심사 학기에는 논문을 작성하기 보다는 심사를 위한 발표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이다.
긴장된 얼굴로 프린터 앞에 앉아 본인의 논문 초고를 출력하는 동기들의 모습을 볼 때 나 역시 비슷한 긴장감에 휩싸이곤 했다. 우리가 같이 입학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 그들은 졸업을 위한 마지막 관문에 들어서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뒤따라오는 감정은 두려움이다. 그들은 심사를 준비하면서 두려워하고 있고, 나는 그런 그들을 바라보며 나는 저 자리에 갈 수나 있을까 하고 두려워한다.
5월에 진행되는 본 심사는 1차와 2차로 나누어지는데 1차는 공개 심사로 진행되어 심사위원, 지도교수님 뿐 아니라 같은 학과의 누구라도 심사장에 들어와서 발표를 들을 수 있다. 논문 심사의 하이라이트이다. 본인이 몇년동안 고생을 하며 쓴 글을 심사위원 몇명에게만이 아니라 만인에게 공개하는 자리이니 얼마나 민망하고 두렵고 떨리는 자리인지 말하지 않아도 짐작할 것이다. 이 공개 심사는 그 다음 논문 심사를 준비하는 학생들에게는 가장 좋은 예시가 될 터라 심사장에는 신입생들을 비롯한 많은 학생들이 참석한다. 발표자들도 이전 선배들의 공개 심사에 참석했었으니, 모르는 사람들이 우루루 참석한다고 해도 그것을 원망할 수는 없다.
심사장이 있는 건물은 남향이었다. 커다란 창문을 통해 더없이 밝고 따스한 봄 햇살이 심사장을 가득 채움과 동시에 더 무겁고 짙은 긴장감이 당사자 뿐 아니라 그저 심사를 구경하러 온 나 같은 학생들에게도 동일하게 내려 앉았다. 왜냐하면 앞으로 저 자리에 내가 앉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칫 실수로라도 웃음을 띠지 않기 위해 노력하면서 심사를 구경한다.
발표자는 준비한 논문 요약문을 읽고, 심사위원 교수님들은 날카로운 질문을 한다. 논문 심사까지 올라왔다는 것은 지도교수님이 보기에도 심사를 무난하게 통과할 것으로 봤다는 것이고, 지도교수님의 보증이 있기 때문에 다른 심사위원 교수님들도 이 학생을 무조건 떨어뜨려야겠다는 심보를 갖고 계시진 않을 터이지만, 그럼에도 질문은 매우 날카로운 칼이 되어 발표자의 멘탈에 박힌다. 발표자는 최대한 당황하지 않은 척 연기를 하면서 침착하게 답을 한다. 그 답변이 질문을 한 교수님의 성에 차지 않으면 멘탈을 후벼 파는 질문 공세가 다시 쏟아진다. 등줄기에는 땀이 흐르지만 그 질문마저 예상했다는 표정을 연기하며 발표자는 예의바르게 답변을 이어간다.
그리고 발표자에게 임재하는 그 무겁고 숨막히는 두려움은 삽시간에 그 광경을 바라보는 나에게 동일하게 퍼진다. 전쟁터에서 쏟아지는 포탄 한 가운데에 있는 나의 전우, 나의 동학을 바라보며 나는 과연 저 자리에까지나 갈 수 있을지 되묻는다. 그들의 잘 정리된 발표문을 보며, 논리적으로 구성된 논문의 목차를 보며, 논문의 내용과 구성에 찰떡같이 붙은 각 장의 소제목들을 보며.
발표자는 심사의 두려움을, 심사장에서 제3자로 그 모든 광경을 한 편의 연극처럼 관람하는 나는 저 자리까지 가야만 한다는 과정의 두려움을 겪는다. 동일한 장소에서 우리는 각기 다른 역할을 연기하며 각기 다른 두려움을 경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