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배수현 May 25. 2022

크리에이터가 기획한 장례식 - 1편

이어령 선생님의 49재 장예전

전 세계를 덮은 바이러스로 지난 몇 년간 우린 이전과 생소한 일상을 살았습니다. 재택이 일상화되고, 줌으로 회의를 하고, 가족과 친구의 얼굴을 보지 못했죠. 몇 년간 지속된 이 비(非) 일상은 일하는 공간, 집의 역할, 사람을 만난다는 것, 가족 등 많은 것들의 의미를 바꿨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죽음은 공평하다



나는 이 기간 동안 지인, 친척, 친구의 죽음을 맞닥뜨렸고, 예상치 못한 이별에 황망했습니다. 그래서인지 백상 예술대상 시상식에서 배우 조현철 님이 투병 중인 아버지에게 담담하게 소감을 전했을 때, 심연에 묻어버리고 있던 (어쩌면 나에게도 닥칠지 모를) 이별이 상기되어 무척 마음이 동요했습니다.


투병 중인 아버지에게 용기를 드리고자 잠시 시간을 할애하겠습니다

아빠, 눈을 조금만 돌리면 마당 창 밖으로 빨간 꽃이 보이잖아. 그거 할머니야. 할머니가 거기 있으니까, 아빠가 무서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죽음이라는 게 단순히 존재 양식의 변화인 거잖아.

작년 한 해 동안 첫 장편영화였던 <너와 나>라는 작품을 찍으면서 나는 분명히 세월호 아이들이 여기에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어. 그리고 그 영화를 준비하는 6년이라는 시간 동안 나에게 아주 중요했던 이름들, 박길래 선생님, 김용균 군, 변희수 하사, 이택경 군, 세월호의 아이들. 나는 이들이 분명히 죽은 뒤에도 여기 있다고 믿어. 그러니까 아빠, 무서워하지 말고 마지막 시간 아름답게 잘 보냈으면 좋겠습니다. 사랑합니다.

- 배우 조현철 님의 수상소감


이 수상 소감은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삶은 공평하지 않습니다만, 모두에게 죽음은 공평합니다. 죽음 앞에서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 이 질문에 나는 곰곰이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삶의 끝에 죽음이 항상 있음을 기억하는 <메멘토 모리>로 죽음을 의미 있게 준비한 어느 분의 49재 소식을 들었습니다. 바로, 이어령 선생님의 49재 <장예전(長藝展)>입니다. 이어령 선생님이 돌아가시기 이틀 전 장례식을 디자인해 주겠냐는 약속으로 예술가들이 모여 예술로서 장례식을 기렸다고 하죠. 크리에이터들은 한 사람의 삶을 어떻게 추억했을까요?





물건에 담긴 그의 이야기를 기억하다



북한산 숲 자락 언덕의 영인문학관은 이어령 선생님과 부인 강인숙 부부가 설립한 문학 박물관입니다. 평창동은 집 크기가 유난히 큰 저택들이 대부분인데, 영인 문학관은 그 사이에 아담하게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1970년대 이어령 선생님이 들어와 집을 지으실 때는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 언덕이었다고 해요."
- 장예전을 안내하신 분과의 대화


그러니까 40여 년을 사시던 집의 아래층에서 49재 장예전을 본 셈입니다. 어쩐지 나는 이어령 선생님이 집에 나를 초대해 생전의 책도 보여주시고 어릴 적 사진부터 소중한 물건을 하나씩 꺼내어 보여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사진 출처: 매일경제 '예술로 이어령을 기리다' https://mbn.co.kr/news/culture/4752663


전시관 전체는 나무에 흰 광목을 휘감은 것이 마치 성경에서 성소와 지성소를 나눈 휘장의 느낌을 받았습니다.


전시의 첫 시작은 그의 물건들이었습니다. 어릴 때 사진부터 공부할 때 소중히 여겼던 물건들, 편지들, 소중한 선물들에는 물건마다 에피소드가 있었습니다.



사진 출처 필자

소소한 이야기를 읽느라 사람들은 모두 허리를 숙이고 얼굴을 깊게 들이밀었습니다. 나는 에피소드를 통해 몰랐던 이어령 선생의 삶과 생각, 그리고 태도를 들여다볼 수 있었습니다.


그는 우리나라에 초대 문화부 장관이었습니다. 그 이전에는 우리나라에 '문화'를 위한 장관은 없었다고 하죠.



"나는 아무것도 없는 빈 벌판에 집을 세우러 가는 목수이다. 목수가 자기가 지은 집에서 사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문화부의 네 기둥을 다 세워놓고 나는 떠난다. 그때 정말 이 집주인이 올 것이다."
- 이어령 선생 첫 문화부 장관  임명 시 인터뷰 내용


그는 인터뷰에서 한 약속대로 네 기둥을 다 세우고 자진해서 장관직을 물러났습니다.

이어령 선생님이 장관 재임 때 한 일 중 가장 유명한 것이 '로드 숄더'라는 외국어를 '갓길'이라는 말로 바꾼 일이라 알려져 있습니다. 지금은 흔히 쓰이는 '갓길'이 이어령 선생이 창시한 단어라니.. 그 외에도 한국예술 종합학교를 인가하고 국립 국어교육원을 발족하는 등 문화와 예술의 확산을 진행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많은 예술가들이 그를 <크리에이터들의 크리에이터>로 부르고 있고, 본인도 그 어떤 직함보다 크리에이터로 불리길 원했다고 하죠.



재미있는 에피소드 중 하나는 이어령 선생님이 일하는 방식입니다. 서재에 긴 책상을 짜서 PC 7대를 갖다 놨습니다. 의자를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이 일에서 저 일로 옮겨 다녔다고 하죠.


"봐야 할 데이터가 겹치는 것이 싫어 예전부터 컴퓨터를 여러 대 놓고 작업했다. 찾을 자료도, 저장할 자료도 많은데 한 대의 컴퓨터로는 해결이 나지 않아 총 7대의 컴퓨터를 함께 연동해 사용했다."
- 장예전 이어령 선생 인터뷰 글






글에 담긴 그의 이야기를 기억하다



전시회의 동선은 자연스럽게 그의 물건을 통해 그의 삶을 따라갔고, 그의 저서를 통해 그의 생각을 읽어보는 스토리로 이어졌습니다. 그래서 나는 전시의 끝에서 그가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 알 수 있었죠.



사진 출처 필자
사진 출처 필자

각 책에는 왜 이 책을 집필했는지 그의 생각이 함께 태그 되어 있었는데, 나는 2022년 선생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집필하신 책 <거시기 머시기>에 눈길이 갔습니다. 평생을 언어를 만들어온 선생님의 말과 글과 책에 대한 최종 산출물 같아서 이 책은 꼭 읽어야만 할 것 같았죠.



사진 출처 필자


그가 아끼던 물건과 그가 쓴 글들로 나는 이어령 선생님의 인생을 알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사람들에게 여러분의 어떤 물건과 글을 소개하고 싶은가요?


책들을 지나 다음 휘장은 이어령 선생님의 작품들로 넘어갑니다. 나는 이어령 선생님을 언어학자로 알고 있었는데 <장예전>에 와서야 이 분이 예술적 끼가 다분하셨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의 디지털 퍼포먼스의 기획들과 이 분과 일했던 예술가들의 인터뷰에 대해 다음 글에서 소개하려고 합니다.





* 2편으로 이어갑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브랜드를 전시합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