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너구리야. 고마워
일상 속 삶의 질을 결정하는 중요 요인 중 하나가 평온한 기분 상태라고 생각한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은 죽음 이후에나 가능할 테고, 살아있는 한 예기치 않은 크고 작은 일들이 폭죽 터지듯 빵빵 터질 때가 있다. 불꽃놀이 관망하듯 호기롭게 지켜볼 정도의 내공이 없는 나로서는 그때마다 잔잔한 호수에 파동을 넘어 흙탕물 뒤집어쓴 기분이 되곤 한다.
흙탕물 같은 기분이 정화되렴 아무 말도,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야 하지만, 뒤집어진 기분에 불안해진 나머지 파동의 원인이 된 짱돌 하나 찾겠다고 호수를 헤집어 놓다 점점 불쾌함의 수렁에 빠져든다.
요 며칠 언니일로도 그렇치만 직장에서 함께 일했던 동료와 관련해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 동료와는 작년 한 해 함께 일하며 서로 배려하지 않는 근무태도나 근무규칙을 지키지 않는 점, 아이들을 대하는 고압적인 자세 등 여러 문제로 갈등이 있던 터라 올해는 재계약을 진행하지 않았다. 그렇게 더 이상 볼 일이 없어진 동료였지만 내심 그 친구가 학교와는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 다른 계통으로 이직했으면 했다. 하지만 내 바람과 달리 동료는 다른 학교로 재취업에 성공했다.
그 소식을 듣고 이틀간 심사가 편치 않았다.
남에게 피해를 주며 자신의 이득만 취하는 이기적인 사람은 그에 합당한 불이익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현재 관점에서 아무 일 없다는 듯 잘 살고 있는 게 화가 났다. 또 지난 1년간 그 동료로 인한 스트레스를 해소하지 못하고 꾹꾹 눌러놓은 감정의 잔재들이 봉인해제되어 분출하는 듯했다.
문제는 이런 감정이 나를 불편하게 한다는 점이었다.
생각해 보면, 앞으로 다시 마주칠 일도 없거니와 그 친구도 나름의 밥벌이는 하고 살아야 하므로 어느 직장이건 다시 일을 시작할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는데 말이다. 일시적인 부정적 감정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하루를 꼬박 그 감정에만 매몰되어 화가 난 내 모습은 자연스럽지 못했다.
불편한 감정을 안은 채 퇴근을 했고 서둘러 저녁을 먹고 혼자 산책을 나섰다. 다시 찾아온 한파에 바삐 몸을 움직여 걷다 보면 엉켜버린 뇌가 실타래 풀리듯 풀릴지도 몰랐다.
작심하고 마음의 미로를 찾아 나선 끝에 산책이 끝나갈 즈음 현재 감정의 원인을 찾을 수 있었다.
첫째, 최근 언니와의 관계로 이미 불편한 감정이 선점해 있었고
둘째, 작년 한 해 감정이 좋지 않았던 동료에게 침묵과 무시로 일관했지만 내내 화를 삼키고 있었으며
셋째, 내 인생에 빌런들은 왜 이리 많은 것인지 마음 한편 침울해 있었다.
역시 추위를 참고 산책 한 보람이 있었다. 마음을 들여다보니 불편한 감정이 조금 누그러졌고 내 마음에도 공감해 주니 화가 풀렸다.
그렇게 산책을 마무리하고 집으로 향하던 중 도로를 가로질러 공원으로 잽싸게 이동 중인 '야생너구리'커플을 발견했다. 안전거리를 확보한 후 녀석들을 지켜보니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두 녀석은 서로 바짝 몸을 붙인 채 나무 밑에 가만히 있었다. 그 모습이 귀여워 가던 길을 멈추었고 녀석들도 고개까지 돌려가며 나를 한참이나 응시했다. 야행성인 녀석들이 공원에서 출몰할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현수막 문구가 무색하게 어둠 속에서 빤히 바라보는 녀석들이 귀여워 피식 웃음이 났다.
야생너구리의 귀여움에 조금 전까지 헤매던 부정적 감정은 말끔히 사라졌다. 역시 귀여움을 이기는 감정은 없나 보다. 귀여움의 최고봉을 자랑했던 내 반려견들이 나를 위로한 힘도 바로 귀여움이었다.
귀여운 야생너구리야.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