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려견은 신이 준 선물
15년 만에 '강아지' 없는 삶을 살고 있다.
직장에서의 시간을 제외하면 내 시간이 곧 강아지들의 시간이었던 공유의 삶에서 이제는 낯설어진 혼자만의 삶으로 바뀌었다.
기한이 있음은 알았지만 정녕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던 귀여운 존재들에게 밀당은 있을 수 없어 정만 흠뻑 주었는데 녀석들은 정만 버려두고 하루아침에 사라져 버렸다. 주인을 잃어버린 내 '정'을 지켜보는 심정은 '말로 다 할 수 없다'는 일곱 글자 외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이제는 덩그러니 남겨진 '정'을 다시 거둬들여야 할 무거운 과제만 남았다. 생각보다 크고 깊은 '정'을 한꺼번에 소화하기 힘들어 조금씩 잘게 잘라 힘겹게 삼켜내 보지만 뒤따르는 침묵만이 상실의 아픔을 드러낼 뿐이다.
자식과도 같은 반려견을 잃은 슬픔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또 무엇으로 위로할 수 있을까.
인간계에서 사랑의 순도가 가장 높다는 부모 자식 관계도 어릴 때는 부모가 일방적인 사랑을 아낌없이 내주지만, 자녀가 성장하면 늘 바라기만 하는 자녀에게 서운함이 생기기 마련이다. 부모자식 관계도 이럴진대 다른 인간관계는 논해서 무엇할까.
그래서 강아지와의 사랑은 참으로 특별하다.
막말로 이 녀석들이 내게 효도를 할 것도 아니고, 아플 때 수발을 들거나 봉양을 해줄 것도 아닌데 어떻게 이런 한결같은 사랑이 지속 가능했을까.
일단 강아지는 귀엽다.
작은 체구에 눈코입귀가 올망졸망 박혀있고 특히 얼굴의 반을 차지할 만큼 큰 눈과 깜장 한 코는 귀여움을 배가 시킨다. 또 외출했다 집에 들어오면 오매불망 나만 기다렸다는 듯이, 때론 죽었다 다시 살아난 사람을 만나기라도 한 듯 반가워 어쩔 줄을 몰라한다. 10분 만에 만나건, 몇 시간 만에 만나건, 며칠 만에 만나건 반가움의 표현은 한결같이 동일하게 과하다. 그런 녀석들을 볼 때마다 마음 한편 '누가 나를 이렇게까지 반겨줄까.'라는 자조섞인 감격의 혼잣말이 나왔다.
게다가 강아지는 인간의 말을 못 하는 관계로 그날 기분이 안 좋아 곱지 않은 말투가 나와도, 또 고민에 빠져 허우적대느라 녀석들에게 향하던 눈길을 거두어도 내게 왜 그런 식으로 말하냐며 삐지는 일도, 서운하다며 토라지는 일도 없다. 그저 한결같은 시선으로 나만 바라볼 뿐이다.
세상 어떤 인간이 그런 한결같은 사랑을 줄까.
유기견이었던 녀석들을 덕 쌓는다는 심정으로 곱게 키웠다고 생각해 왔는데 돌아보니 녀석들이 내가 준 사랑보다 더 큰 사랑으로 나를 키워 주었다.
그렇게 9년, 14년을 함께했던 두 녀석을 작년 한 해 모두 떠나보냈다.
녀석들이 떠나고 한동안은 한겨울 세 찬 한파에 포근히 감싸주던 푹신한 이불이 인정사정없이 매몰차게 걷어진 듯 마음이 시리고 허전해 어쩔 줄을 몰랐다. 새롬이 마저 떠나자 녀석들이 쓰던 옷가지며 장난감도 대부분 버렸지만 자주 입었던 옷 몇 벌과 애착인형 몇 가지는 상자에 보관해 두었다. 또 씩씩이가 떠나기 전 잘라 둔 '꼬리털'과 새롬이의 '발 톱' 한조각도 함께 보관해 두었다.
아직은 삼키지 못한 슬픔이 많이 남은 탓인지 녀석들의 유품 상자를 열어볼 엄두가 나지 않는다.
이 슬픔이 온몸이 녹아내리는 무기력으로 이어진다면 병원 치료라도 받아야겠다 다짐했지만 다행히도 직장에서 쓸 에너지 만큼은 남아 있다. 먹고는 살아야 하니 최소 일할 에너지는 확보해야 한다는 기치 아래 병원 방문을 최후 배수진으로 쳐놨는데 역시 난 타고난 완소녀(완전 소처럼 일하는 여자) 팔자인가 보다.
새롬아. 씩씩 아.
이별의 시간이 무색하게 엄마의 그리움은 어째 시간이 흐를수록 더 진해져.
너희들의 죽음을 통해 세상사의 덧없음을 보았고, 사랑만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가치라는 걸 배웠다. 너희들이 준 사랑의 에너지는 그간의 결핍을 다 채우고도 남았어. 그 사랑은 엄마가 남은 삶을 열심히 살아갈 수있는 동력이 되어 주고 있어.
보고 싶고 또 보고 싶다.
고마운 나의 아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