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쓸데없는 짓

by 써니현

어릴 적 집에 낡은 전래동화 전집이 있었다.

책을 접할 곳이 마땅치 않았던 시골에서 호기심을 채워줄 마땅한 인적, 물적자원이 없었던 터라 심심할 때마다 책을 읽었다, 얼마나 읽었던지 전집 속 내지가 떨어지면 풀로 붙여가며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읽었다.

흥부놀부, 콩쥐팥쥐. 장화홍련 등 스토리는 대략 나쁘게 살면 벌을 받고, 착하게 살면 복을 받는다는 권선징악적 내용이 주를 이루었는데, 착하게 살면 어떤 복을, 언제 받을지도 모르는 불확실한 모호함보다 감각적으로 와닿았던 끔찍한 벌이 더 솔깃하고 무서웠다. 게다가 살아서 벌을 받지 않으면 죽어서라도 지옥에 갈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후부터는 죄를 지으면 통장에 적금 쌓이듯 차곡차곡 어딘가에 기록되는 거 아닌가 걱정하기도 했다.


그런데 웬일!

살아보니 나쁜 짓을 한 사람이 꼭 벌을 받지도 않고(무전유죄, 유전무죄라는 말이 생긴 이유) 착한 사람이 반드시 복을 받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분별없이 착하기만 한 사람은 주변 소시오패스나 나르시시스트들의 먹잇감이 되어 가족들까지 고생시켰다.


또 인간은 이분법적인 악인과 선인만 존재하지도 않는다.

검은색, 흰색 외에 수많은 색이 존재하듯 나처럼 적당히 착한 사람이 되고 싶어 약간의 손해는 용인할 수 있어도 큰 손해는 절대 보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고, 상황에 따라 때로는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이 되기도, 나쁜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이런 복잡다단한 인간 심리를 무시하고 양극단의 대척점에 놓인 인물로만 묘사된 동화 속 주인공은 도덕성이 형성될 시기의 아이들에게 자칫 '착한 사람 콤플렉스'를 가진 어른으로 성장할 위험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역시 이놈의 '전래동화'가 나의 평생 고질병이었던 '착한 사람 콤플렉스'에 한 몫하지 않았나 싶다.

또 나르시시스트에 가까웠던 엄마는 자주 자신의 딸들이 착하다고 자랑했다. 엄마가 이야기하는 착함의 기준은 지금은 자신에게 용돈을 매달 주는 것이며, 어릴 때는 엄마의 말을 고분고분 잘 따르고, 징징대지 않아 자신을 힘들게 하지 않는 것이었다.


난 꽤 오랜 시간 스스로 규정해 놓은 착함의 굴레를 쓰고 살아왔다.

내 옷을 사거나 혼자 하는 외식에 돈을 쓰는 건 아까웠지만 가족들에게 선물을 하거나 가족 외식에 돈을 쓸 때는 아깝지 않았다. 이런 내 모습을 지켜본 친구는 내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했지만 당시 내게 착함의 기준은 나 보다 타인을 위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나는 남에게 '착한 사람'보다 나에게 '착한 사람'으로 살기로 했다.

인생의 반을 내 기분보다 타인의 기분을 먼저 살피느라 눈치를 봤다면 이제는 내 감정에 먼저 반응해 주기로 했다.


그렇게 결심하게 된 많은 이유가 있지만 그중 하나는...

마음의 그릇부터 간장종지인 내가 큰 세숫대야가 되겠다며, 착한 행동을 하고 나면 '인정'받고 싶다는 내밀한 욕망과 함께 인정받지 못하면 '억울함'이라는 감정이 꼬리를 물었다. 또 주는 사람 따로 있고 받는 사람 따로 있는 것처럼 호의가 권리가 되면 더 이상 고맙다는 말조차 들을 수 없게 된다.


내 노력을 인정해주지 않는 사람들에게 억울한 마음이 들면 당사자에게는 정작 표현하지 못하면서 주변에 하소연하곤 했다. 누가 시켜서 한 희생도 아니건만 나 스스로를 피해자로 만들어버린다. 이런 하소연은 또 착한 사람임을 알아달라는 인정욕구와 맞닿아 있었다. 어느 순간 피해자 모드로 남에게 까지 착함을 인정받으려 구는 내 모습이 참 한심스럽게 느껴졌다.


두 다리 멀쩡하게 돌아다닐 수 있는 건강수명도 채 20년이 남지 않았다.

이제 남은 20년 만이라도 남의 기대에 맞추기보다 내가 원하는 대로 단순하게 살고 싶다.

세상에서 가장 쓸데없는 짓이 '남에게 인정받으려 애쓰는 일'이다.

인정해주지 않는 상대에게 억울함이 올라온다면 이제 그 짓을 그만해야 한다는 신호이다.

인정을 남에게 얻으려 하지 말고 스스로 인정할 수 있도록 이만하면 충분하다고 자신을 격려해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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