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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마모토로 떠나는 문학 여행

by 어떤 하루

일본은 1월 둘째 주 월요일이 성년의 날이라서 매년 토일월 연휴가 된다. 1주일 가까이 연말연시 휴가를 보내고 덜 풀린 몸으로 며칠 출근하고 나니 이 연휴가 무척이나 고맙다. 그렇다고 흐지부지 연휴를 보내기는 싫고, 집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었는데 또 밖으로 나돌아 다니기도 뭐 해서, 바람도 쐴 겸 오랜만에 당일치기 뚜벅이 여행을 다녀왔다.


전부터 계획했던 '구마모토 문학 여행'. 타이틀만 거창할 뿐이지 그냥 나 혼자 뚜벅뚜벅 걸으면서 일본 근대 문학계의 문호인 나쓰메 소세키와 고이즈미 야쿠모의 흔적을 살짝 느껴보고자 하는 여행이다. 목적지는, <소세키가 살던 집>, <야쿠모가 살던 집>, 그리고 <구마모토 문학관> 정도이다.

보통열차를 타고 구마모토로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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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오카 시내에서 가미구마모토(上熊本)역까지 대략 2시간 정도 소요된다. 서울에서 맨날 2시간씩 통학해왔던지라 전철 2시간쯤이야 거뜬하다. 집에서는 한 장만 넘겨도 졸음이 쏟아지는 독서도 신기하게 전철 안에서는 술술 읽혀서 좋다. 나름 문학 여행이니, 그동안 찔끔찔끔 읽다가 여태 다 못 읽은 책을 읽어 치웠다.


구마모토역보다 한 정거장 전인 '가미구마모토역'에 내렸다. 소세키가 구마모토의 제5고등학교의 영어교사로 부임했을 당시, 이 가미구마모토역(당시는 이케다 정거장)에 내렸다고 하여, 역 앞에는 소세키의 동상이 놓여있다. 달리 말하면, 소세키가 처음 접한 구마모토의 풍경이 바로 이 역 주변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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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세키가 살던 집 <나쓰메 소세키 우치쓰보이 옛집(夏目漱石内坪井旧居)>
가미구마모토역에서 걸어서 15분 남짓. 거리에는 여전히 재작년에 있었던 지진의 피해 흔적이 눈에 띈다. 그런데 불현듯 안 좋은 예감이 밀려온다. '아... 내가 지금 향하는 곳은 100년도 더 된 목조 주택이지...'. 조용한 주택가에 도착하니 그 예감은 적중했다. 지난 지진 피해로 우치쓰보이 옛집의 내부 견학이 안 된단다. 그나마 정원에서 외관은 견학할 수 있게 되어 있어서 아쉬운 대로 외관을 둘러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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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세키는 구마모토에서 지낸 4년 3개월 동안 무려 5번이나 거처를 옮겼다고 한다. 외부적인 사정에 의한 건지, 아니면 개인적인 성향 탓인 건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이 우치쓰보이에 거주했을 당시 첫째 딸이 태어났다고 하니 소세키 가족에게 이 집이 특별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외부에 설치된 설명 패널에는 흥미로운 내용이 적혀 있었다. 소세키가 구마모토에 거주했을 당시 많은 동료 문인들이나 제자들이 신년이면 집에 찾아와 손님들로 붐볐다고 한다. 이에 신년마다 손님맞이에 지친 소세키의 부인 쿄코와 소세키가 다투게 되었는데, 이를 계기로 소세키는 아예 신년에는 집에 있지 않고 밖으로 여행을 떠났다고 한다. 그때 떠난 여행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것이 그 유명한 <구사마쿠라(草枕)>라고 한다. 이 일화가 어디까지 사실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신년 스트레스로 다툰 쿄코 부인과 소세키를 떠올리면, 바로 지난주에 명절 스트레스를 겪은 터인지 그와 그의 부인에게서 왠지 모를 동질감이 느껴졌다.


#2. 야쿠모가 살던 집, <고이즈미 야쿠모 구마모토 옛집(小泉八雲熊本旧居)>
야쿠모의 옛집도 견학을 못하는 게 아닐까 하는 불안감도 있었지만 일단 발길을 옮겼다. 한적했던 주택가를 나와 구마모토성 주변을 거쳐 시내로 나왔다. 우치쓰보이의 저택이 주택가에 있었던 것과 달리, 야쿠모의 저택은 구마모토 시내 한복판에 있다. 다행히 피해 복구가 끝나서 내부까지 견학이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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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이즈미 야쿠모는 나쓰메 소세키에 비해 인지도가 높지는 않다. 나쓰메 소세키를 언급할 때 거론되는 인물이기도 한데, 일본 문화의 연구와 소개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본래 이름은 라프카디오 헌으로, 영국 출신(그리스 혼혈)이자 일본인으로 귀화한 작가이다. 부모의 이혼, 왼쪽 눈의 실명 등 순탄치 못한 유소년 시절을 겪은 인물로 미국에서 신문기자를 거쳐 일본에 건너오게 된다. 일본에서는 영어 교사로 부임하며 일본의 오래된 문화와 일본인에 대해 관심을 가졌으며, 자신이 보고 느낀 것을 책으로 출판하여 외국에 전하였다. 일본인 부인에게 말로 전해 들은 일본의 고전 설화 등을 독자적인 시각으로 펴낸 책들이 유명하다. 아침마다 가미다나(일본 가정집에 모셔두는 신단)에 합장하고 중요한 날에는 하카마(일본 전통의상)를 착용하는 등 일본인보다 더 일본스러운 생활을 추구했다는 인물로, 그에 대한 평가는 갈리기도 하지만 그가 일본 문화에 열렬한 애정을 쏟아왔으며, 당시 일본 문학계에 큰 영향을 끼쳤던 것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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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쓰메 소세키를 언급할 때 야쿠모가 거론되기도 하는데(그 반대이기도 하고), 그 이유는 공통점이 많기 때문이다. 둘 다 영어 교사를 하여 구마모토의 제5고등학교로 부임하게 되고, 그 이후 도쿄제국대학(현재의 도쿄대학)에서 야쿠모의 후임으로 소세키가 부임하게 된다. 당시 야쿠모의 후임을 맡게 된 소세키는 교육 방식에 대한 차이 등으로 스트레스를 받기도 하였다고 전해진다. 실제로 얼마만큼 소세키가 야쿠모를 의식하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메이지시대를 대표하는 두 문학가의 인연을 엮고자 하는 후대들의 역사적 로망이 담겨있는 것 같기도 하다.


#3. <구마모토문학역사관>
소세키나 야쿠모에 대한 자료를 좀 더 볼 수 있을까 싶어 문학관으로 향했다. 거리가 좀 떨어진 관계로 겸사겸사 구마모토 노면 전차를 타고 이동했다. 관내는 구마모토의 역사를 문학사의 관점에서 개요 정도로 소개하고 있어서 그런지, 소세키나 야쿠모에 관한 자세한 자료를 접하긴 어려웠다. 다만, 디지털 아카이브를 통해 전시되지 않은 작품들도 사진으로나마 볼 수 있었다. 시간이 남기도 하였고, 약간의 아쉬움도 있어서 예정에 없었지만 동네 서점을 가보고 싶어졌다. 그런데 이게 웬걸, 구마모토에 140년이나 된 오랜 서점이 있다고 한다. 갑자기 막 신이 난다. 다시 전차를 타고 서점으로 향했다.

#4. 140년 된 고서점, <나가사키지로서점(長崎次郎書店)>
1874년에 문을 연 나가사키지로서점. 오래된 서점이라서 고서적을 주로 파는 곳일까 싶었는데, 내부는 의외로 일반 서적들로 가득했다. 한편에서는 구마모토에 관련된 서적들을 소개하고 있고, 구마모토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의 작품을 판매하는 잡화 공간도 있었다. 예상대로 소세키와 야쿠모의 서적을 모아둔 서가가 있어서 한동안 시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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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의 2층에는 카페 공간도 마련되어있다. 커피 한 잔 마시면서 서점에는 구입한 책을 읽기에 딱 좋은 공간이었다. 서점 앞으로 노면전차가 지나고 있어서 전차를 관람하기 위해 이 카페를 찾는 사람들도 많다고 한다.

마침 명당자리가 비어있길래 오늘 하루 여행을 기록하면서 전차 사진 한 장 찰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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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서점이 위치한 곳은 구마모토역과 시내 중간쯤에 위치한 '신마치(新町)'라는 동네이다. 뒤늦게 알았는데, 이 서점뿐만 아니라 오래된 건물들이 많이 남아있어서 시내와는 또 다른 분위기를 감상할 수 있는 공간인 듯싶다.

좀 더 살펴보고 싶었는데 뉘엿뉘엿 해가 저물고 있었기에 아쉽지만 다음 기회에 둘러보기로 하였다. 여행은 약간의 아쉬움을 남겨두어야 다시 찾아올 여지가 생기기 때문에, 그것도 나쁘지 않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여행을 마무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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