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숙소에 큰 욕심이 없어졌다. 리조트에서 휴양하는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숙소가 참 중요하겠지만, 우리는 주로 밖에서 발바닥에 땀나도록 열심히 돌아다니는 여행을 추구하다 보니 사실 숙소에선 잠만 자게 된다. 우리 스스로가 어떤 여행 스타일을 좋아하고 어떤 게 우리에게 맞는지 아직 잘 몰랐을 때는 남들 따라하듯 좋아 보이는 숙소에 묵기도 했었다. 그렇지만 숙소에서 제공해주는 서비스를 우리는 잘 활용을 못한 채 체크아웃하기 마련이었다. 항상 결론은 '이렇게까지 좋은(비싼) 숙소에 안 묵었어도 됐을 텐데...'였다.
그런데 이번 여행은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는 게 주목적이었기 때문에 숙소에 좀 더 투자해보기로 했다. 게다가 그동안 열심히 모아 온 카드 포인트를 유용하게 쓰고 싶었기 때문에 이번 숙박비에 보태기로 했다. 그래서 결정한 숙소가 오키나와 북부에 위치한 호텔 빌라 'Chillma' 객실 눈앞에서 에메랄드빛 바다를 원 없이 볼 수 있다는 점, 빌라에 있는 프라이빗 해변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끌렸다. 게다가 빌라 타입이라서 객실에서 취사나 세탁이 가능하다는 점도 여러모로 유용할 것 같았다.
차 내비게이션은 물론이거니, 구글 맵에도 위치 정보가 안 뜰 정도로 구석진 곳에 있다. 호텔 홈페이지에 있는 지도를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겨우 도착했다.
체크인을 마치고 두근두근 빌라로. 오오 바다가 보인다!!
빌라는 총 4동으로, 전부 바다가 보이게 배치되어 있다. 내부 구조는 조금씩 다른데, 그중에서도 아침에 눈 떴을 때 바다가 보였으면 해서 침대가 방 가운데 있는 동으로 정했다. 입구를 들어서면 천장이 뚫린 마당 같은 공간이 있고 정가운데에는 방으로 통하는 큰 창문, 양 옆에는 방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다. 안에 있으면서도 밖에 있는 듯한 모호한 경계가 한 순간에 비일상의 세계로 우리를 초대했다.
두근두근. 예상대로 안에 들어오자마자 베란다 한가득 바다가 펼쳐진다. 와... 이 바다 오늘 하루 전부 다 내꺼. 방마다 작은 수영장이 딸려있다. 이 또한 바다와의 경계가 모호해서 마치 바다 속에 들어간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눈 앞에는 고우리지마라고 하는 작은 섬이 보인다. 섬, 바다, 하늘. 뭐가 더 필요할까. 그냥 발코니에서 바닷바람 맞으면서 멍 때리고 싶다. 책 읽다가 그대로 잠들고 싶다. 하지만 현실은 태풍이 몰고 오는 강풍 때문에 분위기 잡다가 바람에 휩쓸려 갈 것 같았다. 빨리 방으로 들어가자...
우리의 저녁과 아침을 책임질 주방은 아일랜드 키친. 이 주방 우리 집으로 가져오고 싶다...
방의 정중앙에 위치한 침실. 침대에서 한 발짝도 안 움직이고 이 바다를 볼 수 있다니. 올해도 진짜 열심히 일하길 잘했어.
화보 비주얼과 달리, 실제로 이 욕실이 우리 집에 있었다면 욕조 주변에 튄 물 때문에 엄청 스트레스받았을 것 같지만, 여행지니까 세상 너그러워진다.
태풍 오기 전에 프라이빗 해변에 가서 바다에 발가락이라도 담갔어야 했는데, 사실 새벽 비행기로 경유해서 오다 보니 여행이고 뭐고 현실은 졸음과의 사투였다. 한숨 자고 나서 어두워지기 전에 부랴부랴 동네 슈퍼에서 장을 봐왔다. 그런데 슈퍼가 생각보다 작아서 우리가 기대했던 현지 먹거리를 별로 공수하지 못했다. 아쉬운 대로 오키나와산 돼지고기와 고야(여주), 우미부도우 등을 사 왔다.
오키나와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고야 챔플. 고야(여주)와 계란, 스팸 등을 볶아 만든 음식인데 소박하지만 자꾸 젓가락이 가게 된다. 씁쓸한 여주가 은근 중독성 있다. 그리고 빼놓으면 섭섭한 우미부도우. '바다 포도'라는 명칭 그대로 포도알 같은 해초인데, 오키나와가 덥고 습하다 보니 우미부도우의 깔끔한 식감이 자꾸 땡긴다.
그렇게 오키나와에서의 밤이 저물어 간다.
우리가 이 멋진 숙소를 얼마나 잘 활용했을까. 되짚어보면 아쉬운 점도 있다. 날씨 탓에 발코니를 거의 사용하지 못했고, 수영장과 프라이빗 해변에는 발가락도 못 담갔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시간과 마찬가지로 공간이라는 것도 어떻게 쓸지는 답이 없는 것 같다. 남들이 다 하는 방식이 아니어도 괜찮다. 한번 포기했던 여름휴가를 어렵게 다시 왔다는 것만으로도, 그리고 그 시간을 여기서 보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가 그 숙소에서 묵었던 의미는 충분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