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에서는 역시 땡볕 아래 에메랄드빛 바닷속에서 남국의 여름을 즐기는 게 제맛이지만, 그 반면 언제 덮칠지 모르는 태풍을 주시해야 한다. 2년 전 여름휴가를 오키나와에서 보냈을 때도 태풍 때문에 여행 직전까지 고민하다가 '에라 모르겠다'싶은 맘으로 오키나와에 갔는데, 정말 운 좋게도 태풍이 정체된 덕분에 무사히 휴가를 보낼 수 있었다. 그런 경험 탓이었을까. 이번 오키나와 여행 직전에도 태풍이 북상 중이었다. 운 좋게 태풍을 피한 경험이 있던지라 비껴갈 수도 있다는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예정대로 오키나와로 향했다. 게다가 홋카이도 지진 때문에 한번 연기했던 여행인지라 무리를 해서라도 이번 여행은 감행하고 싶었다.
그런데 이번만큼은 신은 우리 편이 아니었다. 태풍은 기상예보대로, 모질게도 우리의 여행 일정과 겹치게 되었다. 우리의 돌아가는 비행기가 태풍의 직격탄을 맞게 될 것이라는 뉴스를 접하고 비행기가 결항되기 전에 미리 하루 전날 비행기를 확보해두었다. 아쉽지만 이번 오키나와 여행은 1박 2일로 마치고 서둘러 돌아가려고 했었다. 그러나 우리의 발 빠른 대응을 비웃기라도 한 듯, 미리 확보해둔 비행기 편부터 줄줄이 결항이 정해졌다. 그리고 공항 폐쇄. 공항으로 향하는 고속도로도 통행금지. 불행 중 다행히도 우리가 묵기로 한 민박집에서 하루 더 묵을 수 있게 되었다. 원래는 다음 손님이 있었는데, 그 손님들도 태풍 때문에 오키나와까지 못 오게 되는 바람에 방이 비었다는 것이다. 마치 우리를 안 돌려보내 주려는 듯 민박집에서 2박을 하게 되었다.
호화스러운 리조트보다 현지 사람들의 사는 냄새가 물씬 풍기는 민박집이 좋다. 그래서 오키나와 중부 차탄의 민박집을 잡아 두었다. 숙소로 향하는 길은 이미 태풍의 전야제. 거친 비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무사히 숙소 도착. 민박집은 현지 할머니가 사시는 집의 한켠을 제공받는 스타일이었다. 기본적인 관리는 따님이 하셨는데, 우리가 도착하자마자 숙소에 대해 이것저것 설명해주셨다. 그리고는 할머니님이 우리를 위해 바나나와 귤을 준비해주셨다면서 과일 바구니를 건네주셨다. 벌써부터 현지인의 인정이 느껴진다.
이 집에 새끼 고양이가 있다면서 싫지 않으면 같이 놀아달라고 하셨다. 이름은 비비짱. 우리와 함께 놀 고양이를 안겨주셨는데 새끼 고양이치고는 꽤 컸다. 오키나와 기준으로는 이 정도가 새끼 고양이인가? 싶어서 그냥 넘겼는데 녀석이 바로 도망가 버렸다. 낯을 가리는구나 싶어서 잊고 있었는데 잠시 후 남편이 잠깐 밖에 나간 사이 아까 도망쳤던 고양이가 집 안으로 들어왔다. 근데 이 녀석 보통 애교쟁이가 아니었다. 아까는 도망가더니 이 냥이씨 아주 밀당의 고수고만. 우리 곁을 떠날 줄 몰랐기 때문에 같이 자기로 했다. 내 생애 첫 고양이와의 동침. 남편은 원래 고양이를 좋아한다. 아주 물 만난 고기처럼 고양이를 잘 다룬다. 전부터 고양이 키우고 싶다고 했는데, 이거 진짜 고양이 키우면 내 자리를 뺏길 것 같다. 아주 둘이 러브러브모드다.
그렇게 비비짱과의 하룻밤을 보내는 사이 태풍은 점점 오키나와 본토에 가까워졌다. 민박집이 50년도 더 된 목조 건물이다 보니 바람 소리며 바람에 무언가가 부딪치는 소리가 제법 컸다. 밤새 몇 번 불이 나갔다 들어왔다를 반복하기도 했다. 다행히 일단은 무사히 아침이 밝았다. 그런데 충격적인 사실이 있었다. 할머니께 밤사이의 고양이 이야기를 했더니, 큰 고양이는 밖에서 키우시는 고양이란다. 응? 그럼 우리랑 같이 잤던 비비짱이 비비짱이 아니란 말이야...? 그렇다, 우리는 집에서 키우는 비비짱이 아닌, 밖에서 키우는 치비짱과 같이 하룻밤을 잔 것이다. 치비짱은 몸에 벼룩이 있을지도 몰라서 집안에는 절대 안 들인다고 하셨다... 응? 우리 같은 이불에서 뒹굴면서 같이 잤는데...? 뭐 죽기야 하겠어 싶어 그냥 넘겼다. 치비짱 덕분에 즐거운 하룻밤을 보냈으니까.
진짜 비비짱 등장. 집에서 키우는 새끼 고양이라는 말을 이제야 납득했다. 진짜 비비짱은 새끼 고양이였다.
여행 숙소로 민박집을 선택한 이유 중 하나는, 바로 현지 식사를 체험해 볼 수 있다는 점이다. 화려하지 않지만 오키나와 사람들이 평소 먹는 음식을 맛볼 수 있다는 점이 내겐 매력적이었다. 무인지 양배추인지 가늘게 썰어서 새우에 볶은 반찬이 있었는데 한국에서도 삿포로에서도 먹어본 적 없는 맛이었다. 나중에 여쭤보니 '파파야'라고 하신다. 오키나와 답게 고야 챔플과 삼겹살을 조린 반찬이 나왔다. 할머니의 손맛이 더해져서 정말 맛있는 아침 식사였다. 아침 식사를 마친 후에도 주방에서 뭔가를 만드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후식으로 드래곤 후르츠와 바나나를 넣은 스무디를 만들어 주셨다. 오키나와를 한껏 머금은 맛이었다.
태풍이 북상 중이다 보니 밖에 나가지 못했다. 그저 집 안에서 이 태풍이 무사히 지나가 주길 바라는 수 밖에는 없었다. 그래도 지루함을 달래줄 고양이가 있으니 조금은 위로가 되었다. 그런데 애완동물을 키워본 적이 없다 보니 고양이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몰랐다. 아직은 거리감이 느껴지는 비비짱. 그저 멀리서 바라만 본다.
태풍은 예보대로 오키나와 본토를 가로지르며 북상하고 있었다. 아침 식사 후 나른하게 시간을 보내던 중, 갑자기 불이 커졌다. 정전 발생. 잠시 후 바로 불이 다시 들어왔지만, 그 이후로 다시 정전. 태풍이 오키나와 본토에 도달한 듯싶었다.
진짜 이제까지 들어본 적 없는 바람 소리에 압도되었다. 지진이 일어났나 싶을 정도로 건물이 움직이는 듯한 느낌이었다. 민박집에서 빌려주신 전등과 라디오에 의지하며 태풍이 무사히 지나가 주길 바랐다.
정말 감사하게도 이 와중에 점심과 저녁을 제공해주셨다. 원래는 조식만 제공되는 숙박이었는데, 태풍이라 아무 데나 못 가니까 간단하게나마 식사를 준비해주신다고 하셨다. 할머니가 전날 밥솥 한가득 만들어 놓으신 카레. 근데 비비짱이 음식 냄새를 감지하고는 식탁으로 달려들었다. 에잇, 잡았다 요놈.
태풍 속에서 아무 데도 가지 못하고, 정전까지 된 바람에 거의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하루 전날 서점에서 사둔 책을 읽거나 비비짱과 놀면서 바람이 잦아들기만을 바랐다.
우리가 걱정되셨는지 어머님께서는 간식을 챙겨주시면서 신경을 많이 써주셨다. 오키나와에서 자생하는 감귤류인 시콰사 주스도 만들어 주셨다.
아무것도 안 해도 인간인지라 배가 고파진다. 정전 속에서도 우리를 위해 간단한 식사를 준비해주셨다. 손전등 빛에 의지하며 먹는 야키우동은 평소 먹던 것보다 훨씬 더 맛있었다.
해가 저물기 시작하자 빛이 필요해졌다. 신기하게도 남편이 비상 전등을 준비해왔다. 마치 이렇게 될 걸 미리 예상이라도 한 듯이. 아웃 도어를 좋아하는 남편은 혹시 바다에서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서 평소 낚시할 때 쓰는 전등을 몇 개 챙겨 왔다. 평소 같으면 쓸데없이 여행 짐 늘어난다고 잔소리했을 텐데 이번만큼은 남편이 챙겨 온 전등 덕분에 어둠 속에서 하룻밤을 잘 보낼 수 있었다.
아무것도 안 해도 인간인지라 잠이 온다. 자고 일어나니 다행히 태풍이 지나가 주었다. 하루 만에 집 밖으로 나가봤다. 할머니는 아침부터 집 주변 상태를 살펴보셨고, 태풍으로 지저분해진 우리 자동차를 깨끗하게 세차해주셨다.
우리와 하룻밤 동침했던 치비짱.
비비짱도 태풍이 지나가서 기분 좋아 보인다.
우리는 태풍을 쉽게 봤지만, 결코 녹록지 않았다. 태풍이 오는 걸 알면서도 여행을 감행했기에 자업자득일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어떤 의미로는 다시는 없을 귀중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오키나와에서는 일상이기도 한 태풍. 작은 섬이기도 하고 태풍 발생 지점에 가깝다 보니 일본 본토나 한국에서 겪던 태풍과는 그 규모나 세기가 차원이 달랐다. 이런 태풍을 현지 사람들은 일상처럼 겪고 있구나.
이번 태풍은 오키나와에서도 오랜만에 겪는 큰 태풍이었다고 한다. 현지인들이 이렇게 말할 정도이니 우리 같은 이방인에게는 더 충격적인 경험이었다. 그럼에도 민박집에서 묵어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우리가 만약 호텔에서 묵었다면 빛도 없고 정보도 차단된 상태에서 더 불안했을 것이다. 할머니와 어머님이 태풍과 정전 속에서도 우리를 걱정해주시고 챙겨주신 덕분에 불안 속에서 안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비비짱과 치비짱 덕분에 지루했던 태풍 속 하루를 재밌게 보낼 수 있었다.
정전 때문에 불편했다며 숙박비의 일부를 돌려주셨다. 강한 바람 때문에 혹시라도 렌터카에 흠집이 생겨서 수리할 일이 생기면 본인들 책임이라며 꼭 연락을 달라고 하셨다. 그리고 시콰사 주스가 너무 맛있었다고 했더니 정원에 열린 시콰사를 비닐봉지 한가득 담아주셨다. 오키나와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먹는 스팸과 미소 땅콩도 선물이라며 챙겨주셨다. 아침 반찬으로 내주셨던 파파야가 맛있다고 했던 걸 기억하시고는 파파야도 주셨다.
슈퍼에서 파는 바나나랑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맛있다며 정원에 열린 바나나도 따주셨다.
태풍 때문에 정신없을 시기에 괜히 숙박을 하게 되어서 정말 죄송했는데, 오히려 우리가 불편했을까 봐 신경을 많이 써주셨다. 태풍 덕분에 우리는 어느 여행지에서도 접해보지 못했던 푸근한 인정을 느낄 수 있었다. 불편했겠지만, 앞으로 태풍이 있을 때마다 여기서 보낸 이틀을 추억해 달라는 할머니의 말씀이 기억에 많이 남는다.
여행을 가면 항상 시간에 쫓기기 마련이었다. 한정된 시간 속에서 조금이라도 더 많이 흔적을 남기려고 했다. 그런데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태풍 속에서 우리는 하루라는 시간을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보냈다. 그것도 귀중한 여행지에서. 그렇지만 그 시간이 절대 아깝지 않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일본 본토에서는 절대 겪어 보지 못한 태풍의 위험성을 피부로 직접 느꼈다. 오랜만에 라디오를 하루 종일 들었고, 고양이와 밀당하며 놀았고, 평소 읽고 싶었던 소설책을 읽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민박집의 할머니와 어머님의 따뜻한 정을 느낄 수 있었다.
올여름 휴가는 기억에 많이 남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