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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타 Apr 28. 2021

랭귀지 카사노바는 이제 이탈리아어에 안착합니다.

이탈리아어 만나서 반가워






5월에 새로 나온다는 책을 미리 훑어보았다. 시처럼 쓰는 법_이라는 제목이 눈에 띄었다. 글의 최고의 경지는 시_라고 믿는다. 이 믿음은 중학교 다닐 때부터 시작되었는데 마흔이 너머서도 이 생각이 변하지 않는 걸 보면 나는 역시 산문보다는 운문에 가까운 인간이다. 글을 엄청 잘 써서 누구나 그 친구를 보면 지금 당장 책 내도 팔릴거다 얼른 책 내자 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하지만 그는 아니야 나는 이렇게 여기에서 노는 게 즐거워 라고 대꾸한다. 그 생의 태도는 운문에 가깝다. 친구된 입장으로서는 한 사람이라도 더 그의 글을 읽었으면 싶고 노트북 화면과 휴대폰 화면으로 말고 종이에 인쇄된 그의 글을 읽었으면 하는데 스스로가 움직이지 않는 이상 그의 뜻을 꺾을 도리는 없을듯 싶다. 보고있지? 친구야. 우리 모두는 이런 마음을 품고 있다고! 소리를 버럭 지른다. 그나저나 시처럼 쓰는 법_이라는 책 제목을 본 순간 시처럼 사는 법_이라는 말이 저절로 떠올랐다. 궁극은 시처럼 사는 것이다. 시처럼 사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모르겠다, 지금으로서는 설명하기가 애매하다. 시처럼 사는 법_이라고 한다면 주변에 누가 있을까 곰곰 생각해보니 그 친구가 떠올라서 그 친구 이야기도 잠깐. 시처럼 사는 건 역시 이탈리아가 짱이지 나지막하게 중얼거려본다.





 하루에 이탈리아어 공부를 3시간씩 하던 때가 있었다. 뒤돌아보니 3시간 했다고 하지만 실상 따져보자면 한 시간 정도는 이탈리아어 갖고 노는 연습을 했고 나머지 두 시간은 이탈리아어 언제 잘 하게 되나 하고 공상하는 시간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니 어디 한 시간으로 단어 정리를 하겠는가, 문법 공부를 하겠는가, 숙어를 외우는 것이 가당키나 하겠는가. 헛된 시간을 보냈다. 위 사진은 그때 하루 한 시간 공부하던 옛날 사진이다. 우리 아가가 어린이집 막 들어가고 이제 나는 자유다 두 손을 번쩍 하늘로 뻗고 서강대 어학원에 곧바로 등록을 했다. 그때 모두 신부님도 프랑코 선생님도 성형외과 원장님도 만났다. 수강생은 열명 내외 였던 걸로 기억한다. 굳이 성비 구분을 따지자면 여자는 성형외과 레지던트였던 언니 한 명과 나란 아줌마 둘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남자였다. 신부님들이 두 명이었고 유학 준비를 하는 성악 전공자, 미술 전공자들이었다. 그때나 이때나 눈에 띄는 이들이 있으면 가서 곧바로 안녕하세요 저는 누구누구인데 우리 통성명하고 인사하고 지냅시다. 그렇게 해서 성형외과 레지던트 언니와 신부님들과 인사를 텄는데 나중에 성형외과 레지던트 언니는 바빠서 두 달 지나서 안 나왔고 두 신부님들 중 한 명은 내향적이셔서 말씀을 거의 안 하시길래 마띠아 신부님과 주로 수다를 떨었다. 이탈리아를 가면 뭐 하자 뭐 하자 뭐 하자 그곳에서 만나면 이것도 하고 저것도 보고 놀자 놀자 놀자. 그때 맺은 인연들 마띠아 신부님은 여전히 로마에서 유학중, 프랑코 선생님은 상해에서 이탈리아어 가르치시고 성형외과 레지던트 언니는 본인도 성형을 하시고 강남에 성형외과를 차려서 연예인들이 어마어마하게 간다는 소식을 우연히 접했다. 






 어젯밤 이탈리아어 단어를 외우다가 아이고 골치 아프다 하나도 모르겠다 하고 침대 위에 대자로 뻗었다.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아 슬프다 딸. 하니까 딸아이가 다가와 위로를 해주었다. 내가 다섯 살때 이탈리아어 공부했다며? 근데 그게 아직까지 엄마 머릿속에 있으면 엄마는 천재지. 괜찮아. 다 잊었으니 새로 시작하면 되는거야 라는 위로를 받으며 묘하게 기분이 나빠졌다. 거의 10년인데 그 10년이면 다른 거 공부 하나도 안 하고 이렇게 조금 저렇게 조금 그렇지 않았더라면 지금 이탈리아어로 번역하고 있겠네!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리고 홧김에 와인 한 잔을 마시고 꾸벅꾸벅 졸면서 이탈리아어 공부를 하고 있는데 남자가 들어왔다. 화들짝 놀라 얼른 이탈리아어 책을 다른 책으로 덮어버렸다. 아직까지는 남편에게 말하지 않았다. 나 다시 이탈리아어 공부하고 싶어, 라고 이야기하면 남자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아니까. 샤워를 다 하고 와인 한 잔을 따라서 오랜만에 옆에서 이야기를 하던 남자가 어 저게 뭐지? 하고 덮어놓은 책들 사이로 손을 내밀었다.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내가 숨겨놓은 이탈리아어 문법서를 탁 펼치고 남자가 아이구야 했다. 그게 여보 어떻게 된 거냐면 우물쭈물 이야기를 하려니 나 몰래 또 이탈리아어 시작한 거지? 어쩐지 컴퓨터 배경화면도 카톡 배경화면도 노트북 배경화면도 모두 다 피렌체로 바뀌어 있어서 아니 이 아줌마가 설마 했는데 역시! 







 에라 모르겠다 심정으로 나 이탈리아 갈 거야! 하니 어이없는 표정으로 황망해하던 남자는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이탈리아어 자격증 B2 따갖고 와. 그 전에는 절대 허락하지 못해! 응? 나는 물어보았다. 이탈리아어 자격증 B2 따갖고 오면 나 보내주는 거야? 응, 그 전에는 안돼. 민이도 영어랑 이탈리아어 준비해놓고 가. 가서 애 고생시킬 생각 하지 말고. 급밝아진 표정으로 혹시 B1은 안 되겠니? 하니 안돼! 그렇게 해서 일단락을 지었다. 집에 있는 프랑스어, 독일어, 스페인어 교재 모두 상자에 넣어둬. 다시는 못 봐. 이제 이탈리아어만 봐! 그래서 남자에게 가서 누나 보고싶다고 울지 말고 3년만 참아 하고 가슴에 턱 손을 얹고 나도 모르게 눈을 깜박이는 횟수가 현격하게 늘었다. 그 표정을 지켜보던 남자가 자격증 못 따면 택도 없어. 그리고 딸아이 잠자는 데 옆에서 꽁알꽁알거리면서 이야기. 아빠가 보내주신대. 근데 이탈리아어랑 영어 공부 해야해. 안 그러면 못 가. 딸아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이겼군. 하고. 금세 또 표정이 바뀌며 뭐야 시작도 안 했는데 영어랑 이탈리아어 공부 하기 싫은 거야? 하니 아니 누가 하기 싫다고 했나 뭐 하고 쳇 하는 표정을 짓길래 그럼 뭐 우리딸이 가기 싫다고 하면 공부하기 싫다고 하면 어쩔 수 없지. 여기에서 학교 다니고 있어, 엄마 혼자 얼른 공부하고 올게 했더니 고개를 홱 벽 쪽으로 돌리길래 삐쳤나 싶어서 공부하기 싫으면 괜찮아 여기에서 아빠랑 있어도 돼. 하니까 어깨가 들썩들썩. 옴마나 하고 억지로 딸아이 고개를 돌렸더니만 눈물범벅이다. 황당해서 물었다. 아니 왜 울어? 아가 하니까 엄마가 나랑 아빠 버리고 이탈리아 혼자 간다고 했자나! 나두 갈 거야 이탈리아! 엉엉엉 하고 오열. 공부해서 같이 가면 되는 거잖아! 울지 마! 아가! 하니까 나는 엄마 없으면 콱 죽어버릴거야. 거짓말인 줄 알면서도 나 홀로 감동먹고 벅차서 이 엄마도 민이 없으면 콱 죽어버릴거야! 했더니 눈물을 쓰윽 닦고 방금 전에 뭐랬지? 너는 한국에 있으렴, 엄마 혼자 이탈리아 가서 공부하고 올게 라고 한 사람이 누구였지? 아 당했다;;







 아침에 일어나 간단하게 아침 먹으면서 남자가 신나서 말했다. 나 이탈리아 가면 여기도 가고싶고 저기도 가고싶고 또 거기도 가볼래! 응? 저기 여보세요. 아저씨는 여기에서 일하셔야 하고 이탈리아 가는 건 저희가 가는 건데요? 했더니 싫어 싫어 싫어! 나도 일 다 때려치우고 이탈리아 갈래! 누나! 아....... 보다 더 상세한 스케치는 뭐 앞으로 나아가다보면 그려지지 않을까. 자기야는 일단 여기에서 돈을 벌고 있다가 제가 공부 마치고 일을 할게요. 그때 일 때려치우세요, 허니! 했더니 눈을 반짝인다. 확대되는 남자의 동공을 지켜보면서 아 어쩌지 그냥 이탈리아 가지 말아야 하나 어째 플랜대로 가지 않네. 당황해하며 아침 크로와상이랑 커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 와중에 우리 선생님도 티라미수 케이크를 좋아하신대 엄마 하는 딸아이, 아 딸아 너 그거 아니? 티라미수도 이탈리아어란다. 자 이리 와서 스펠링 좀 써보련? 엄마가 알려줄게 그 뜻을 했더니 냉큼 온라인수업 하신다고 도망간다. 딸아이 방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남자가 다시 눈빛을 반짝이면서 하는 말, 이번 생에 다시 스페인어, 프랑스어, 독일어 한다고 또 그러면 확 헤어져버릴거야! 너의 인생에는 이제 이탈리아어뿐이야. 다시는 랭귀지 카사노바 짓거리 할 수 없어. 라고. 아니 근데 여보 이탈리아 가면 스페인 애들이랑 프랑스 애들이랑 독일 애들도 만날 텐데 하니까 눈빛이 잠시 흔들리더니 어차피 걔네들이랑도 다 이탈리아어로 이야기해야 할 거 아니야. 이탈리아어 막히면 영어로 하겠지. 이제 네 인생에 스페인어, 독일어, 프랑스어는 없어! 쾅쾅. 근데 이탈리아 가서 뭐 공부하려고?



이탈리아 페미니즘은 어떤지 구경 좀 하고 올까 해. 

뭣?! 벌떡 일어서는 남자. 

지그시 지켜보며 싱긋 웃는 여자. 




이탈리아어 문법서 펼치기 전에 오늘의 일기를 먼저 올립니다. 그럼 챠오. 

이탈리아어 문법서를 펼치고 아베체데 하고 있지만 마음은 벌써 그람시 읽는다! 

우리 엄마가 그러셨거든, 여자는 꿈을 품고 사는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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