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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타 Apr 27. 2021

아픈 화분에 물을 주면 빛이 난다.

한지혜, [참 괜찮은 눈이 온다]를 읽고





살아가는 내내 웃음만 짓는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할까? 나는 아픈 속내는 말하지 않고 어린 연인에게 그런 질문을 던졌던 적이 있다. 빚쟁이들의 악다구니 속에서 두 귀가 먹먹했고 어둠이 찾아와 빚쟁이들이 사라지면 남은 이들끼리 악다구니를 지르는 동안 우는 동생들을 달래면서 살풋 잠 속으로 빠지는 순간이 좋았다. 고통과 불안과 눈물이 멈춰지니까.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나오지만 작가도 그랬던 적이 있다고 한다. 피하고 피해서 도달한 길이 책인데 읽다 보면 빠져들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 좋았노라고.




 "아프고 괴롭고 불안하고 막막한가. 그렇다면 그것은 당신의 삶이 성장하고 있다는 증거다. 도망치지 마라. 원래 희망은 아프다. 그래서 꽃이 피는 것이다." (280)




 아프지 않으면 좋겠다. 괴롭지도 않고 불안도 없으며 막막해서 절벽 아래로 쉼 없이 떨어지는 와중에 언제 바닥에 닿게 될지 알 수 없는 그런 순간들을 다시는 마주하고 싶지 않다. 만일 도망칠 곳이 있고 도망쳐서 붙잡히지 않는다면 그렇게 도망을 치고 싶다는 생각도 해본다. 성장 따위 하지 않아도 되고 꽃 따위 피지 않아도 좋다. 이 모든 것들이 순간 사라지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본다. 어깃장을 놓고 뻗대면서 징징거리고 싶어 지는 순간들. 그 와중에 작가의 문장들이 내 어둡고 습하고 차가운 핏 속에 눈발을 날린다.




 "고통은 왜 누군가의 이름으로 알려지고 설득되어야 하는가. 고통을 설명해야 하는 건 기금을 모집할 때만이 아니다. 공적 기금이나 후원이 필요한 이들도 스스로 자신의 고통이나 가난을 증명해야 한다. 결핍과 아픔과 절망을 누군가의 특정한 이름으로 노출하고 공감을 얻는 사회를 두고 '고통의 포르노'라는 말을 떠올린다면 비약일지 모르겠지만, '고통의 증명'을 강박처럼 요구하는 사회는 맞는 것 같다. 세상 어딘가에 기근이 있고, 세상 어딘가에 전쟁이 있고, 세상 어딘가에 학대가 있고, 세상 어딘가에 장애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연민과 연대가 가능할 수는 없을까. 얼마나 아픈지 묻지 않고 돕는 사람들의 연대 같은 걸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234-235)




 코로나로 더 이상 사우나 나들이를 할 수 없지만 코로나로 세상이 번잡스러워지기 전에 종종 사우나를 갔다. 그곳에서 가끔 마주하는 한 여인이 있었다. 어떤 날에는 허벅지가 멍들어 있고 어떤 날에는 등이 멍들어 있다. 어떤 날에는 정강이가 멍들어 있고 어떤 날에는 얼굴이 멍들어 있다. 얼굴도 예쁘고 몸도 저리 예쁜데 왜 맞고 살까? 왜 도망치지 않을까? 옆에 앉은 나이 든 엄마에게 소곤소곤거렸던 적도 있었다. 소곤소곤 소곤소곤 물방울은 천장에서 똑똑 떨어지고 수증기는 하염없이 뿌옇다. 함부로 위로하지 말라. 여인의 눈빛은 단호하다. 맞고 계속 사는 여인이 어리석은 걸까. 도망치지 않고 저렇게 몸 곳곳에 멍이 들면서도 왜 신고하지 않을까. 나 홀로 시나리오를 써보지만 동정과 위로의 눈길과 소곤거림에 맞서는 여인은 장군이었다. 여인을 만나고 온 날 한지혜의 저 문장들을 마주했다. '얼마나 아픈지 묻지 않고 돕는 사람들의 연대' 나도 그런 게 있다면 가입하고 싶다.



 "세상 모든 삶과 세상을 떠난 모든 죽음들에게 그들의 삶을 그들의 것으로 돌려주고 지켜주는 봄이었으면 좋겠다. 천지에 흐드러진 꽃조차 자기 이름을 가지고 태어나 자기 이름으로 저물지 않던가." (154)




 지금 뭐가 제일 힘들어요?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빙긋 웃으면서 물었던 적 있다. 나도 빙긋 웃으면서 아직도 길을 헤매고 있어요. 이 길이 내 길이다. 이 사람이 내 사람이다. 여기가 나 죽어 묻힐 곳이다. 그렇게 딱딱 알면 좋겠는데 아직도 헤매네요. 이 길이 내 길인지 이 사람이 내 사람이 맞는지 여기에서 쭉 살다 죽어도 되는지 모르겠어요. 나는 언제쯤이나 내 이름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을까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곰곰 물어보았다. 정답이 없는 인생이고 정답이란 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알 무렵인데도 누가 알려주면 좋겠다 싶어 나도 무수히 점집을 드나들곤 했었는데. 죽기 직전에도 모르겠지 싶은 순간들. 한지혜의 문장들이 겨울바람 찾아들 무렵 찾아왔다. 현실적이고 리얼한 이야기만 한가득이라서 책을 처음 받아 든 날 모두 읽었고 뭔가를 적기 위해서 다시 펼쳐 들었는데 제대로 읽지를 못하겠다. 아프고 저릿하고 괴롭고 따뜻하고 눈물겨운 지난 시간들이 회오리치듯 몰려들어서. 




교복을 입던 시절 반에 아픈 화분이 하나 있었다. 아프니까 누군가가 잘 돌보겠지 싶어 관찰을 했는데 세상에 맙소사 그렇게 정이 많은 담임 선생님도 순서 돌아가며 맞이하는 주번들도 마흔 명 빼곡하게 들어찬 우리 반에 아픈 화분 하나가 있다는 걸 아는 건 나 혼자뿐이었다. 사라져도 아무도 모르겠구나 싶어 마음이 쓰렸다. 물을 주고 잎을 닦아주고 집에 있는 비료를 비닐봉지에 담아갖고 와 흙 곳곳에 섞어놓았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아 자그마한 화분을 들고 생물 선생님에게로 들고 갔다. 집이 너무 작다. 옮겨 심자 하고 선생님과 옮겨 심었다. 이게 너의 이름이다 하고 이름을 붙여주고 쓰고 있었던 관찰일기를 그 아이의 옆에다 놓아두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사흘이 지났다. 아이는 반짝반짝 빛을 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던지 그 아이를 주인공으로 시도 쓰고 짧은 산문도 쓰고 그랬다. 나 말고 누군가 한 명 더 아이에게 관심을 갖고 말 한마디를 더 건네고 사랑을 해주면 아이가 얼마나 좋아할까 싶은 마음에 관찰일기를 놓아두었다. 노트에 스티커가 붙고 노트에 아이에게 보내는 편지가 놓이고 아이를 향한 글들이 한 페이지, 두 페이지 늘어갔다. 아픈 그 아이가 우리 반 아이들의 모든 사랑을 받으면서부터 얼마나 무섭게 자랐는지 얼마나 튼튼하게 자랐는지 얼마나 빛이 났는지 그 후 이야기는 하지 않아도 될 거 같다. 한지혜의 문장들은 그때 그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세상살이가 삭막하다는 걸 알게 되면 어른이 되는 거라고 했던가. 세상에 얼마나 좋은 사람들이 많은지 세상이 얼마나 정으로 그득한지 알게 되면 그 또한 어른이 되는 길 아닐까. 한지혜의 문장들이 나를 살린다. 아파서 비실비실 샛노란 얼굴로 빼꼼히 세상을 바라보는데 자꾸 물을 주고 잎을 닦아주고 비료를 준다, 나를 주인공으로 시를 쓰고 소설을 쓴다. 나를 세상의 중심자리에 놓아둔다. 자꾸 웃고 싶게 만든다. 이제야 알 거 같다. 그때 그 보잘것없던 아이가 그렇게 아름답게 성장할 수 있었던 까닭이 무엇이었는지.



 당신, 아직도 한지혜를 읽지 않았다면 당장 서점으로 달려가시기를. 봄을 진정한 봄으로 만들 수 있는 문장들이 여기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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