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강록의 말에서 비롯된 노력에 대한 단상
일주일 동안 잠잠히 늘어져 있던 몸 속 근육을 깨우는 시간. 지금 막 트레이너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근력 운동을 하고는 유산소까지 마친 후 스트레칭 존에 들어와 누워 있다. 귀에 이어폰을 꽂고 유튜브에 접속해 검색창에 meditation music을 적는다. 이 시간에 주로 검색하는 단어다 보니 m만 쳐도 상위에 최근 검색어로 올라온다. 줄곧 클릭하던 10시간 짜리 영상 대신 스크롤을 좀 더 내려본다. 제목에 ambient가 포함된 영상을 선택하고 핸드폰 화면을 덮고 매트 위에 눕는다. 귀 속으로 파고드는 소리에서는 느린 속도로 변하는 앰비언트 사운드와 물소리가 포개진다. 자주 듣던 명상 음악에서와는 다른 물소리. 이 소리는 계곡에서처럼 졸졸졸, 혹은 가열차고 시원하게 흐르는 대신 깊은 동굴 속 어딘가에 자리 잡고 앉았을 때 들려올 법한 울림이 긴 소리다. 동굴 속 종유석 끝에 아등바등 붙어 있다가 기어코 바닥의 웅덩이로 하강하는 물방울 소리처럼. ‘퐁당.’ 그 소리가 어쩐지 엠비언트 사운드와 잘 어울린다.
이제 집중을 몸으로 옮겨본다. 눈을 감고 손바닥은 가볍게 천장을 바라보도록 바닥에 툭 늘어뜨리고 온 몸에 힘을 추욱 빼고서는 호흡한다. 배가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가 작아진다. 더 이상 내뱉을 숨이 없다고 느껴질 때까지, 몸의 구석구석 어딘가에 남아 있을 숨들을 모조리 내보내 본다. 배에 숨어 있던 근육들이 뻣뻣하게 조여진다.
집중력이 짧은 편이다. 몸을 들여다 보다가도 금세 다른 생각이 침투한다. 유산소 운동을 하면서 보았던 손석희 인터뷰에서 최강록이 한 말이 떠오른다. “시간과 귀찮음이 더해지면 맛있는 요리가 된다.” <흑백요리사> 준결승전에서 주어진 180분 동안 다른 출연자들과 다르게 왜 단 하나의 요리만을 만들었냐는 진행자의 물음에 대한 대답이었다. 그렇지. 몸과 마음의 불편함을 견딜 때, 그러니까 좀 귀찮아도 한 번 썰 것을 두 번 썰고, 대충 삶을 것을 뭉근하게 고으며 더 많은 정성을 기울일 때 좋은 요리가 만들어지겠구나.
최강록은 귀찮음(을 견디는 것)이라는, 그답게 뻔하지 않은 단어를 골랐지만 그 말은 더 익숙한, 그래서 지루하기까지 한 다른 단어로도 바꿀 수 있다. ‘노력.’ 언젠가부터 ‘노력’이란 단어는 좀 복잡해졌다. 무엇인가 이루기 위해 애쓰는 자세, 원하는 상태에 이르고자 도모하는 마음 같은 것이 노력이라면, 사람들이 노력하는 이유는 그 과정의 어느 순간엔가 스스로 이루려는 것, 도달하려는 곳에 도착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끝내 도착점에 다다를 수 없다는 것을 깨닫자, 그리고 그것이 불공정한 사회 시스템과 관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터득하자, ‘노력’은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은밀하게 강요되는 태도라는 의구심이 피어나기 시작한다. 한때 위로였던 “아프니까 청춘이다”는 이제 청년을 노력의 사지로 내모는 폭력적인 강령이 되었고, “노오력”의 가치에 힘을 싣는 말은 무비판적으로 불공정을 수행하는 부류로 낙인찍힌다.
몸은 아등바등 마음은 노심초사. 흔들리는 노력의 시간들을, 그리고 노오력 따위 더 이상 하지 않겠다는 반항의 시간들을 지나 오면서 다시 “시간과 귀찮음”을 견디는 마음에 대해 생각한다. 그리고는 노력의 방향을 점검해 본다. 나의 노력은 어디를 향하고 있었나. 더 잘하기 위해서, 더 좋은 성과를 내기 위해서, 더 많은 지식을 쌓기 위해서. 아니다. 귀찮음을 데리고 사는 일은 어쩌면 나를 더 잘 사랑하는 일에 관한 것이 아닐까. 나의 몸을, 나의 마음을, 나의 감각을 보살피고 헤아리기 위해서는 시간과 귀찮음을 견디는 노력을 기해야 한다.
이상하다. 편안해진다. 불편함을 받아들이겠다고 마음먹자마자 마음에 기이한 평화가 퍼지기 시작한다. 귀에서 여전히 울리고 있는 물방울 소리처럼, ‘퐁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