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에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콘체르토에 대해서 쓴적이 있다. 작업용 플레이리스트로 마땅한 음악이 한동안 없던차에 오랜만에 새롭게 발견한 곡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렇게 글을 쓰고 음악을 듣다보니 아서 루빈슈타인이 1950년에 녹음한 버전까지 찾아듣게 됐다. 루빈슈타인은 폴란드를 대표하는, 한때 클래식계를 주름잡았던 음악가다. 같은 곡이라도 그 곡에 정을 붙이고 반복해 들을수록 음악가에 따라 곡의 느낌이 꽤 많이 달라진다는걸 알게된다. 그리고 루빈슈타인이 연주한 라흐마니노프를 듣고 나서야 그 음악이 김연아 선수의 프로그램에 쓰였던 곡이란걸 깨달았다.
아니, 깨달았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곡이 그곡이 아니란걸 글을 쓰면서 또 깨달았다. 분명히 한 대목에서 김연아 선수가 양팔을 뻗치고 한쪽 다리를 우아하게 뒤로 쭉 뻗으며 얼음판을 시원하게 가르는 장면이 떠올랐다. 그래서 라흐마니노프가 분명 밴쿠버 아니면 소치의 배경음악이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글을 쓰지 않았다면 분명 나는 김연아 피겨 프로그램곡 =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이라는 착각을 쭉 이어갔을 것이다.
글이 지닌 힘이란 실로 엄청나다. 이렇게 사소한 착가일지라도, 글을 쓰기전의 나와 글을 쓴 뒤의 나는 다른 사람이 되어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경험을 토대로 이렇게 글이 지닌 힘을 피력했지만, 지금부터는 실시간으로 실험을 해보고자 한다. 글로 써내지 않은 일상적 소재를 글로 쓰는 과정속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 전후 비교를 해보려는 것이다. 소재는 오늘 YMCA 체육관에서 스쿼트를 하면서 유달리 강렬하게 느꼈졌던 두 다리 근육의 감각이다. 글을 통해서 나는 이 단편적인 허벅지의 감각의 이면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글을 어떻게 시작해야할까 생각하기도 전에 이미 떠오른 출발점이 있다. 이 감각을 제대로 표현할만한 단어가 마땅치 않다. 다리에 알이 베는 감각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한 이 감각을 어떻게 표현해야 적절할까? 고통이라면 고통의 일종인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고통이라는 두글자만으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뭔가가 있었다. 양쪽에 10파운드로 몸을 풀고서 25파운드로 교체한 뒤부터 조금씩 느껴지는 자극이 있었다. 다리가 뻣뻣하게 굳어오는 감각이라고 하기엔 그렇게 무거운 무게도 아니었고 일어서는데에도 별 지장이 없었다. 마지막에 양쪽 35파운드를 끼웠을 때에도 큰 무리없이 10회를 거뜬히 해냈다. 예전에도 이정도 무게로 스쿼트를 한적이 있었고, 이번처럼 한참을 쉬다가 오랜만에 한적도 있었다. 하지만 다리 근육에 뭔가 수은이 빽빽하게 차오르는 느낌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엑스맨이었던가, 울버린의 몸에 약물을 주사해 온몸의 뼈가 금속으로 변하는 장면이 떠오른다. 울버린의 일그러진 인상이 보여주는 정도의 고통은 없었지만 근육이 질적으로 바뀌는 것만 같았던건 확실하다. 아마도 지난주에 수영장에서 사이드킥을 죽자고 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수영을 몇년이나 했는데 이제서야 사이드킥을 제대로 하기 시작했다는게 스스로도 놀랍지만 어쨌든 그랬다. 정말로 킥으로만 4-50분 가량을 왕복했다. 예전에는 킥은 대충 설렁설렁 차는둥 마는둥이었다. 템포를 일정하게 유지하며 정말로 추진력을 더해주는 킥은 그렇게 오래 찰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운동을 하다보면 한번씩 근육 섬유 하나하나가 완전히 새롭게 느껴질때가 있다. 내 몸이 낯설어지는 순간이다. 보통은 낯선 고통을 통해서 근육을 새롭게 인지한다. 평소에는 조용히 존재감 없이 있던 근육들에게 중량의 자극을 가하면 근육들이 회신을 보내오는 것이다. 작은 움직임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며 목소리를 낸다. 오늘은 유달리 날카로운 목소리로 응답을 해오는 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 이 감각은 고통이라기보다는 낯설음이라고 하는게 적절하겠다.
굳은살을 벗겨낸 뒤에 느껴지는 생생한 감각. 피부가 까졌을때 고통은 그동안 표피에 쌓여있던 새로운 세포들이 세계에 노출됨으로써 생겨나는 익숙지 않은 감각의 일환이다. 수염을 기르던 사람이 면도 후에 느끼는 얼굴의 감각, 혹은 입대전에 머리를 짧게 자른 사람이 뒷덜미로 느끼는 겨울 공기의 날카로움 같은 것들도 마찬가지다. 막상 쓰고보니 글 몇문단으로 오늘 느꼈던 두 다리의 감각이 뭐 대단하게 달라보이지는 않는다. 너무 기대가 컸던건지도 모른다. 낯설은 일을 꺼리는건 그게 보통 고통으로 다가오기 때문인 것 같다. 나 역시 낯선 것으로부터 일단 도망치고 보는 습성이 있다. 하지만 익숙지 않은 것일 뿐, 밑도 끝도 없는 고통은 아니란걸 생각한다면 낯선 것으로부터 무작정 도망칠 필요는 없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