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계에 봉착하는게 이런 느낌이었다. 아무래도 내 능력으로는 이 이상은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질문을 던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답을 찾지도 못한다. 나아가는건 시간 뿐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저절로 나아가는 것들 말고는 모든게 멈춰있다. 두뇌 회전은 이미 멈췄는데 책상앞에 앉아있는 것 만큼 바보같은 일도 없다. 그리고 그 일을 바로 지금 내가 하고 있다. 새벽 한시 십일분의 학교는 학생으로서 영 드문일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렇게 둔탁한 머리로 앉아있는 일은 또 별개의 문제다.
달리 바라보자면 한계에 봉착하는건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닌지도 모른다. 앞으로 가다보면 더이상 앞으로 나아가기 힘든 지점이 나오는 일이야 당연한 일일 것이다. 사실 뒤로 가더라도 더이상은 뒤로가기 힘든 지점이 나올 수 있다. 그렇다면 앞으로 가다가 더이상 앞으로 가기 어려운 한계를 마주하는건 퍽 긍정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더 이상 뒷걸음칠 곳이 없는게 아니라 더이상 전진할 힘이 없고, 발을 뻗어나갈 지점이 보이지 않는 것 뿐이기 때문이다.
이럴때는 멈추는게 맞는지, 아니면 스스로에게 하는 인공호흡처럼 코로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입으로 천천히 내뱉는 심호흡과 함께 정말로 갈데까지 가보는게 맞는지 모르겠다. 문장이 길어지는걸 보면 지치긴 지친 것이다. 눈을 깜빡인다. 눈꺼풀을 내려 감는건 쉬운데 감긴 눈꺼풀을 겨우 1 - 2센치미터 끌어올리는건 눈에띄게 꿈뜬다. 이것 역시 중력의 힘인걸까. 눈꺼풀의 추락은 쉽고 빠르다. 스키를 타고 내려오는 것은 빠르지만 다시 리프트를 타고 정상으로 올라가는건 느려서 시간이 드는것과 같다.
살아가는 모든 순간 순간이 기본적으로 중력에 저항하는 다양한 활동의 연속이라고 볼수도 있다. 항상 밤이 오면 중력에 순응해 이불의 중력 아래로 몸을 밀어넣어 몸에 작요앟는 중력을 매트리스에 전달하는 루틴을 반복하며 살아간다. 아침이 왔다는건 우선 이불의 중력을 이겨내야 할 때가 왔다는 뜻이다. 옷의 중력, 가방의 중력, 자전거의 중력을 다양한 방식으로 이겨가며 하나의 육체를 어딘가로 옮겨갈 때가 매일마다 찾아온다. 학교속으로 스스로를 집어넣으면 모스크바에서 유학온 두 친구가 늘 스튜디오에 버티고 있다. 벌써 오년째 쌩쌩한 머리로 건축 디자인을 공부해온, 모든게 능수능란한 두 친구다.
중요한건 그들보다 잘하는게 아니라 어제의 나보다 한걸음 더 나아가는 거라고, 어디선가 많이 들은 익숙한 충고가 머릿속을 채운다. 대낮의 학교와는 완전히 다르 모습의 학교가 눈에 들어온다. 스튜디오에서 오르편을 바라보면 대강당 천장의 철제 구조물이 빽빽하게 시선을 가로막는다.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써머타임이 끝났다. 이제 한구과의 시간차는 16시간에서 17시간으로 늘어났다. 지금쯤이면 한국은 저녁 여섯시 반이 넘어갈 것이다. 누군가는 이른 퇴근을 할 시간이고, 누군가는 저녁을 대충 때우고 다시 사무실로 들어갈 시간이다. 오늘은 숙소에서 배추 된장국으로 나름 든든히 배를 채워서 아직까지 허기가 느껴지진 않는다. 김동률님의 플레이리스트는 한바퀴를 다 돌아 침묵에 이르렀다.
상투적이지만 아마도 이 시간은 아름다운 밤으로 기억될 것같다. 한계에 봉착했다는건 한계까지 도착했다는 뜻이다. 이미 먼 길을 지나왔다는 뜻이다. 문제는 얼마 달리지도 않아서 너무일찍 한계에 도달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바로 한계에 봉착한 이들이 공통적으로 갖게되는 생각의 함정이 아닐까 한다. 한계에 도달한 대부분의 이들은 겨우 이것밖에 하지 못하는 스스로에 대한 자책감을 갖는다. 그게 진실이든 함정이든 가져서 좋을게 없는 생각임에는 틀림없다. 자책만큼 한계의 벽을 높이는 삽질도 없다. 그건 말그대로 삽질이다. 벽의 높이는 그대론데, 서있는 땅을 파내려 감으로써 창의적으로 벽의 높이를 높이는 길이다. 정말 잔혹한 폐쇄주의 정치인이 있다면, 멕시코 국경에 말도안되는 장벽을 세우는 트럼프보다 더한 인간이 나타난다면, 벽을 세우는 대신 지면을 낯추도록 명령할 것이다. 그러니까 자책은 트럼프보다 못한 인간이 되는 길이란걸 명심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