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과 비스킷을 위한 하루

by 가소로

빌딩 건축의 기초에 대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총 1000페이지 가량의 책을 일주일 정도 시간을 두고 통독할 계획이다. 졸업을 두달도 남기지 않고 기초 교과서 통독이 썩 잘 어울리는 계획은 아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네 다섯과목씩 들으며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 군데군데 발췌독으로 읽었을 뿐 기초를 처음부터 끝까지 진득하게 읽어본적이 없었다. 거기에다 건축공부를 대학원에서 처음으로 시작한만큼 학부과정 5년에 걸쳐 차근차근 공부해온 친구들에 비해서는 지식이 얕을 수 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지금 함께 공부하는 스튜디오의 장점 중 하나는 학부 5학년들과 함께 수업을 듣는 일이다. 대체로 석사과정을 함께한 친구들과 차이가 꽤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 친구들은 건축을 순수하게 건축으로 바라보는 느낌이다. 방은 방이고 문은 문이다. 벽은 벽이고 바닥은 바닥이다. 무슨 말도 안되는 선문답이냐 싶지만,최근들어 그동안 내가 건축을 바라보는 시각은 이렇게 순수하지 않았다는걸 깨닫게 됐다. 내 습성이라면 건축을 보고 자꾸만 다른 프레임을 덧씌워 해석을 하려는 것이다. 문학을 끌고들어오고, 사회학을 끌고들어오고, 철학을 끌고 들어온다.


똑같은 건축물을 보고도 이렇게 다양한 생각을 끌어들일 수 있다는건 장점이라면 장점이다. 하지만 건축물을 건축물로만 바라보지 못하는건 명확하게 단점이다. 오늘 읽기 시작한 교과서를 통해봤을때 건축은 아주 단순명료하다. 아직 빌딩의 단계에 들어가지도 않고 빌딩이 들어서는 부지에 대한 내용을 이제 막 마쳤다. 그러다보니 보도블럭의 형태가 어떻고, 인도의 폭이 어떻고, 지붕의 각도가 어떻고 등등에 대한 딱딱한 내용이 전부다. 지식으로서의 식감을 말하자면 아주 건조하고 바삭바삭한 아이비 비스킷같다.


많은 동기들이 건축이 가진 이렇게 건조한 비스킷같은 측면을 싫어했다. 건축물을 구조적으로 모델링하는 수업을 들을때면 그런 친구들은 구조에 대한 혐오를 드러내는데 스스럼이 없었다. 기둥과, 기둥 사이를 잇는 빔과, 지붕을 지탱하는 트러스와, 유리벽을 고정시키는 프레임을 만드는 작업이 지겹기 짝이없다는 얘기였다. 자신은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학교에 온거라며 멋드러지는, 혹은 멋드러지길 바라는 유려한 곡선을 그어대며 요상한 건물의 형상을 만들어 가져오곤 했다. 프랭크 게리가 대충 종이를 구겨서 만들어진 형태를 건물로 바꿔내는 것 처럼, 어디서 보도못한 형태를 만드는게 멋진 일이라는 입장이었다.


그런 부류의 건축을 비유하자면 두꺼운 미국식 피자 - 아니 한국식 피자라고 하는게 좋겠다. 가능한 모든 재료를 듬뿍 때려넣은 푸짐한 피자 말이다. 토마토 소스에 각종 치즈, 다진 소고기도 좀 넣고, 베이컨도, 새우도, 감자도, 페페로니도, 피망도, 기타 등등... 간이 되지않은 건조한 비스킷도 음식이고, 잡히는 모든 재료를 투하해서 구워낸 피자도 음식이다. 정사각형 달랑 하나 그려놓은 절대주의 회화도 회화고, 풍만한 육체와 파도가 일렁이는 바로크 회화도 회화다. 뭐가 옳다고 말할 수도 없고, 뭐가 틀렸다고 말할 수도 없다. 다만 무미건조하게 바싹 마른 비스킷에도 그 특유의 풍미가 있다. 피자를 먹고 비스킷을 먹으면 알 수 없지만, 비스킷부터 먹으면 알 수 있는 그 미묘한 풍미 말이다. 세상은 대체로 온통 피자 파티다. 공부에는 때가 있다고들 한다. 아마도 나이를 두고 하는말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비스킷은 피자먹기 전에 먹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보면 공부에는 확실히 때가 있는 셈이다.


쓰다보니 오늘의 글마저도 목이 켁켁 맥히는 밀가루 비스킷이 되고 말았다. 좀더 알록달록 쩝쩝 짭짭 할만한 소재들도 많지만 다음에 쓰기로 한다. 알고보니 색맹이었던 건축가 선생님과, 컬러와 흑백사진 중에서 추상화되고 개념화된 사진은 흑백이라는 어느 학자의 견해와, 극사실주의 렌더링의 시대에 드로잉을 고집하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으로 미루자. 오늘은 물과 비스킷을 위한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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