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신을 다해 수영했다. 스트로크 없이 킥으로만 나아가는 수영이었다. 오늘은 쓰잘데 없는 일에 혼신을 다해보기로 했다. 그만한 사치도 없다. 샤넬 루이비통 에르메스를 사는것보다 시간을 쓸데없는데 쓰는게 훨씬 더 큰 사치라는걸 알아가고 있다. 굳이 분석충처럼 굴자면, 일단 쓰잘데 없다는 말의 어감이 참 마음에 든다. 그보다 더 한심하고 한량같은 모습과 그에 대한 날선 비난의 눈초리까지 잘 담아내는 형용사가 또 있을까 싶다. 쓰잘데 없다는 데에서 나아가 쓰잘떼기 없다는 식으로 변용도 가능하다. 쌍자음이 두개로 늘어난만큼 의미의 강도도 세진다.
단어에 대한 분석은 이 정도로 하고, 쓰잘데 없는데 시간을 쓰는 여러가지 방식들로 넘어가보자. 시간의 속성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시간은 굳이 뭘 하지 않아도 알아서 흘러가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하여 첫번째로 흘러가는 시간을 대-충 수수방관함으로서 시간을 쓸데없이 사용할 수 있다. 무위의 덕이라고 볼 수 있는 방식이다. 이에 반해 두번째는 행위를 잔뜩 응축시킨 방식으로 뭔가를 미친듯이 열심히 하되 그 일 자체에 이렇다할 쓸모가 없는 경우다. 막상 쓰고보니 분석의 범위가 잘못됐다는걸 깨닫게 된다. 애초에 쓰잘데 없는 '일'에 혼신을 다해보기로 했다고 말해놓고는 첫번째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시간을 보낸다는 논외의 상황을 끌어들였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이 글 역시 아주 쓰잘떼기 그지없는 덜떨어진 글로 전락했다. 동시에 나는 쓰잘데 없는 일을 하기로한 결심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는 셈이다.
이 글에서 '쓸모가 있다'는 말은 <사회적 평판과 평가에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는, 혹은 금전적 수익을 창출하는>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한마디로 잘먹고 잘 사는데 도움이 되면 쓸모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잘나가는 영문학자이자 작가인 티모시 모튼 아저씨의 수업이 생각난다. 팀 아저씨는 생존과 삶을 구분했다. 서바이벌과 라이프. 그 둘을 쓸모를 기준으로 구분하자면 서바이벌은 쓸모를 쫓는 길이고, 라이프는 쓸모 이상의 뭔가를 쫓는 길이다. 팀은 '복수'를 예시로 들었다. 누군가 나의 가족을 해치려 했다고 하자. 거기에 직접적으로 보복을 가하는게 서바이벌의 길이다. 반대로 본능적 증오와 보복 충동을 넘어서 용서를 택하는게 라이프의 길이다.
서바이벌은 1차원적 본능에 충실한 단순명료한 삶처럼 보이고, 라이프는 뭔가 숭고하고 좀 고차원적인 가치를 따르지만 그다지 내키지 않는 삶처럼 보인다. 좀 아리송하다. 또 다른 사례는 마틴 루터킹이었다. 흑인 차별에 대해서 즉각적으로 폭력을 통해 보복할 것인가, 커뮤니티의 문화적 단합을 통해서 거시적으로 제도적 변화를 불러올 것인가에 따라 서바이벌과 라이프가 나뉠 수 있다. 라이프는 인간다운 고귀한 삶 정도로 풀어쓸 수 있지 않을까. 당연히 팀의 주장은, 어렵더라도, 우리는 '서바이벌' 대신 '라이프'를 택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주 식상하기 짝이없는 설교식 주장이 아닐 수 없지만 그의 견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었다. 그 선택이 숭고한 희생이나 고귀한 심성에 의한게 아니라 지극히 합리적인 선택이라는 점이었다.
우리가 대체로 서바이벌을 택하는건 보상의 정도와 불확실성 때문일 것이다. 마틴 루터 킹은 '나는 꿈이 있습니다' 하고 연설을 시작하는데 그 꿈이 언제 어떻게 이뤄질지, 이뤄지기나 할지 알수가 없기 때문에 누구나 그 길을 택하지는 못한다. 꼭 이런 꿈이 아니라 일반적인 꿈으로 봐도 마찬가지다. 투자대비 회수를 보장해주는 꿈이 얼마나 있을까. 성취의 순간이 찾아오기까지 버틸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런데 의아하게도 티모시의 주장은 좀 다른 결이었다. 세상에는 애초에 결정적이고 최종적인 성취의 순간 따위는 없고, 상당한 정도의 불확실성이 언제 어디서나 존재한다. 나아가 꿈을 꾸기 시작하는 그 순간부터 해당 시점에 가능한 최대치만큼의 성취가 즉각적으로 이뤄진다는 것이었다.
티모시 교수가 유명인사다 보니 주변 친구들 역시 그에 대한 뒷얘기를 종종 한다. 몇달전에 들은건 팀이 이상주의자라거나, 지나치게 긍정적인 사람이라는 말이었다. 나는 도대체 왜, 쓸데없는 일에 혼신을 다하기로 한 결심으로 시작해 남 뒷담화로 글을 끝맺게 되었는가. 내가 하려는 그 쓸데없는 일이 나에게는 꿈의 일부라서 이렇게 된걸까. 꿈의 일부란걸 알면서도 쓸모가 없다는 이유로 거기에 시간을 들이길 망설이고 두려워했기 때문인가. 그래서 지금 당장은 쓰잘데가리도 없지만 팀의 견해에 따르면 혼신을 다하는 만큼 그 즉시 이뤄지는 뭔가가 있다는 뒷받침 문장을 찾기 위해서였을까.
나의 주장: 쓸데없는 일이긴하지만 그래도 내 꿈이라고 할 수 있는 일이므로 시간을 들여 해야겠습니다.
뒷받침 문장: 왜냐하면 꿈은 꾸고 행동하는 순간부터 이미 이뤄지기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뒷받침 문장' 다섯글자는 '못갖춘 마디'와 어딘지 모르게 비슷한 구석이 있다. 글자수도 그렇고 자음 모음의 구성과 음성적 형질 역시 그렇다. 아무리 뒷받침 문장거리를 찾아놓아봐도 못갖춘 마디같은 허전함을 해결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세상이 애초에 못갖춘 마디와 같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