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 지은 현미밥에 아이리시 숙성 체다치즈를 두덩어리 올려서 우걱우걱 먹고있다. 역시나 토요일 휴일의 학교 데스크 앞이다. 일주일에 하루 쉬는것도 제대로 쉬지 않으면 나중에 번아웃이 올지도 모른다. 이미 그런 경험이 있다. 그 당시에는 몰라도 몇주, 몇달, 아니 몇년이 쌓여 한번에 그 여파가 몰아닥치기도 한다. 그래도 현미밥에다 아이리시에다 숙성된데다 그것도 5년이나, 체다치즈이기까지한 대충 때우는 저녁이 번아웃을 막아줄지도 모른다. 말도 안되는 소리다.
학교에 와서 한 일도 마찬가지였다. 라이노라는 3D디자인 소프트웨어를 연다. 그리고 선을 긋는다. 총 656개의 선을 그었다. 짙은 회색 바탕의 배경에 흰색으로 그은 선이다. 어떤건 직선이고 어떤건 곡선이다. 방향은 대부분 좌에서 우로 그였지만 어떤건 완만한 사선, 어떤건 급한사선, 그렇게 더 기욱어져 수직으로 그은 선들도 있다. 선을 그으면서 옛날 오락실에서 하던 게임이 생각났다. 왼손으로 스틱을 돌리고, 오른손으로 버튼 여섯개정도를 섞어 누르면서 하던 격투게임같은것들이었다. 스트리트 파이터나 철권이 대표적이다. 나는 그런 게임을 잘 못했다.
변명을 하자면 캐릭터들의 움직임과 내가 조종하는 인터페이스간에 부조화가 너무 심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왼손쪽 스틱은 그나마 낫다. 스틱을 꺽는 방향과 동일하게 캐릭터가 걷거나 점프하거나 쪼그려 앉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른쪽 버튼들은 그야말로 전혀 연관성이 없는 움직임을 불러내는 식이었다. 상단 왼쪽 첫번째를 누르면 잽을 날리고 또 뭘 누르면 킥을 하고, 어떤건 하이킥 어떤건 로우킥 등등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다. 게임 속 세계 사람의 움직임과 현실속에서 그걸 조종하는 내 움직임 사이에 이렇게 물리적인 유사성이 없는게 나는 끝내 적응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 이순간으로 돌아와보면 선을 긋는것도 마찬가지다. 선을 긋는 습관은 미술을 배울때부터 시작됐다. 자세한 묘사를 하기가 힘들거나, 아직 할 타이밍이 아닌데 자꾸면 그곳에 손이 가면 화판의 외진곳 배경 구석탱이 같은곳에 선을 긋곤 했다. 선하나쯤 더해도 티가 안나는 그런곳에 선을 긋는다. 그렇게 함으로써 손대지 않아야할 곳에 뭔가 자꾸만 손을 대고싶은 욕구를 풀어내는 것이다. 그건 정말로 효과가 있었다. 그렇게 선을 그음으로써 배경에는 더 깊이가 생겼고, 묘사가 필요한 부분은 적절한 시기에 묘사함으로써 전체적으로 완성도가 올라갔다.
여기까진 딴소리였고, 중요한건 선을 긋는 행위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붓을 화판위에 가져가서 선이 시작되어야할 지점에 붓을 가져다대고 선이 끝나는 지점까지 쭉 밀고나간뒤에 붓을 떼내는 육체적인 행동이 동반됐다. 그게 선을 긋기위한 매뉴얼이었다. 하지만 오늘 사용한 라이노라는 프로그램은 다르다. 선을 긋기 위해서 나는 왼손으로 스페이스바를 한번 누르고 마우스를 두번 클릭한뒤 다시 스페이스바를 한번 누른다. 순수하게 내 몸의 움직임만 놓고보면 왼손 엄지손가락을 아래로 1센치가량 까딱, 그리고 오른손 집게손가락을 왼편으로 1밀리정도 까딱 까딱, 다시 왼손 엄지 1센치 까딱 그것으로 끝이다. 그러면 화면에는 흰색 선이 하나 그어져있다.
선의 물리적인 형태와 내 육체적인 움직임 사이에 그 어떤 필연적인 유사성도 찾을 수 없다. 스트리트 파이터 게임의 캐릭터를 조종하는것과 마찬가지다. 나는 이 얘기를 왜쓴걸까. 얼마전에 읽은 논문과 연관성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도구들과 제스쳐 사이의 관계에 대한 논문이었다. 이얘길 먼저 썼다면 글 전체에 좀더 신뢰도도 생기고 고상하게 읽혔을텐데 내 실수였다. 물론 나는 타이핑과 마우스 클릭 몇번으로 문장의 위치를 깨끗이 수정해낼 수 있다. 즉 지우개로 뭘 지울필요도 없고, 연필심을 닳아가며 썼던 문장을 또 귀찮게 다시 반복해서 쓸 필요도 없다. 이동시킬 문장 클릭, 컨트롤 씨, 옮겨붙일 위치 클릭, 컨트롤 브이, 그걸로 끝이다.
우리가 만들어내는 결과물과 우리 제스쳐 사이에 유사성을 제거하는건 이 첨단 디지털 도구들이다. 이제 첨단이라고 할 수도 없다. 온 세상이 다 첨단 기기들로 뒤덮여 있기 때문이다. 이런 도구들은 일차적으로 우리들의 일상속 제스쳐의 성격을 바꿔놓았다.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방식들이 변했다. 또 뭐가 변했을까? 소통하는 방식도 변했다. 물론 누군가는 아직 육성으로 통화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왠만해선 카카오톡같은 텍스트 메시지를 선호한다. 그러니까 손가락 몇개를 꼼지락 거리는 것으로 소통이 이루어진다.
상대 눈을 보고, 손짓 발짓을 하고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 눈으로 천정을 쳐다보며 잠깐 딴생각도 하는 등의 제스쳐는 모두 의미가 없는 소통 방식이다. 양쪽 기다란 네 손가락으로 폰을 받친뒤 양 엄지손가락으로 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정말 빠르게) 하고자 하는 말을 타이핑한다. 그리고 전송. 누군가 올린 포스팅이 좋다면 좋다는 표현역시 마찬가지다. 포스팅을 더블클릭, 혹은 하트아이콘을 한번 터치하는걸로 충분하다. 그게 곧 우리가 향유하는 사회생활에서 아주 큰 비중을 차지한다. 좋은걸까 나쁜걸까. 또 나의 경우, 미소나 육성의 대화와 유사성의 다리가 끊어진 소통이란 행위를 잘 하고 있는걸까. 스트리트 파이터만큼 못하고 있는걸까. 언젠가는 현미밥에 치즈를 올려 먹는것도 손가락 까딱하는 클릭으로 가능할 때가 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