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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소로 Dec 01. 2023

바나나와 손이 긴 디자이너

그림도 도면도 참 정직하다. 멘붕에 빠진것, 패닉 상태에서 허우적거리는게 고스란히 드러난다. 아마 브런치에 쓰는 글에서도 드러날 것이다. 특히나 얼마전부터는 더 좋은 글을 쓰겠답시고 개인의 감정을 쏟아내는 일기와 같은 글을 쓰는건 삼가기로 했었는데, 그렇게 마음먹고 나니 오히려 글을 쓸 의욕이 나지 않는 것 같다. 매일 계속해서 쓸 수 있었던건 그냥 아무 말이나 생각나는데로 쓰는 일의 즐거움 때문이었는데 그게 사라진 것이다. 잘하려고 할수록 안되고, 잡으려고 할수록 멀어지는 것들로 인해 지금 이순간에 유지해야할 자세가 무너져 내리고 만다. 증상을 분야별로 정리해보면 도움이 될 듯 하다. 


글쓰기에 대해서 먼저 말하자면 다음문장을 선뜻 쓰기가 어려워 망설이는 시간이 늘어나는게 대표적이다. 좀더 좋은것 그럴듯한걸 찾다보니 그런 아이디어를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진다. 문장과 문장 사이가 이렇게 늘어지다보니 글의 리듬 자체가 무너지고 만다. 도면의 경우에는 도무지 정리가 되지 않는다. 이게 벽인지, 벽이라면 어디에 있는 벽인지 정체가 불분명한 선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그림의 경우에는 완성이 되지 않는게 대표적인 증상이다. 예술은 끝이 없어서 완성이라도 완성이 아닌 그런 의미에서가 아니다. 객관적으로 봤을때 제대로 그려지지 않은 부분이 너무 많은 미완성 상태에 계속 머물러 있게된다는 뜻이다. 


글한편을 쓰는 것 조차 힘에 부치는걸 보면 지금 내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알 수 있다. 자전거를 타고 너무 높은 턱을 올라가려다 실패한 나머지 제풀에 지쳐버린 어린이 같은 상황이다. 너무 안간힘을 쓰는 바람에 움직인 거리는 제로인데 체력만 바닥난 꼴이다. 그럴때는 뒤로 눈을 돌려서 자전거의 방향을 틀어야 한다는건 알고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그러기가 너무 어렵다. 턱 너머에 근사한 뭔가가 보이기 때문이다. 이건 마치 바나나 구멍과 원숭이 실험을 떠올리게 한다. 


원숭이 손이 겨우 들어갈만한 구멍이난 유리벽 너머에 바나나를 놓아두고, 원숭이에게 보여주면 손을 넣어서 바나나를 잡고서 아무리 손을 빼려해도 빠지지 않는다. 그런데도 바나나를 놓지 못해서 그 상자에 영영 팔이 낀채로 죽고 만다..? 아마도 여러 동물의 실험 이야기들이 한데 섞인것 같다. 어쨌거나 탐나는 먹이를 잡으려다 온 몸이 구속되고 마는 어리석은 동물 이야기인건 분명하다. 내가 지금 그런 꼴이다. 이렇게 몸이 무거운건 욕심 때문이다. 팔 다리가 뜻데로 움직여주지 않는건 그게 너무 무거운걸 이고지고 있기 때문이다. 1톤짜리 바나나 같은것 말이다. 


1톤짜리 바나나. 미국에서 일하려는 욕심이 없었던 주제에 이제 졸업이 임박해서야 이렇게 안달복달이라니. 평소에는 절대로 세지않던 밤을 이번학기에 몇일씩이나 세다보니 지금도 정신이 몽롱하다. 수시로 나도 모르게 눈이 스르르 감기는 판에 어떻게 좋은 디자인을 할 수 있을까. 고백건데 실력없는 디자이너의 전형을 지금 내가 체현하고 있는게 분명하다. 그렇다. 나는 실력이 부족한 디자이너다. 실력치고 너무 큰 바나나를 집으려다가 상자에 손이 긴 디자이너다. 아니 손이 낀 디자이너다. 디자이너가 손이 길면 다지안하는데 도움이 되려나. 흐리멍텅 반쯤 잠든 머리라 마땅한 마무리 멘트가 생각나지 않는다. 손이 길다, 손이 길다, 되뇌기만 할 뿐 의미상 어떻게 발전이 가능한지는 끝없이 오리무중이다. 손가락이 너무 길어 오히려 타이핑이 어려워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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