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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소로 Dec 23. 2023

생각보다 빠른 태양과 함께하는 촬영

한주내내 비가 내리다가 오늘 비로소 날이 개었다. 햇볕이 좋은날은 건축모델 사진을 찍기 좋다. 특히 9시경 아침의 너무 강하지 않은 햇살은 다른 어떤 인공조명과도 비교할 수 없다. 햇빛을 활용해서 하는 촬영은 특별하다. 학교의 넓은 공용 공간은 평소에 텅 비어있다. 아침 8시 30분이 되면 2층 창문을 통해서 햇볕이 들기 시작한다. 비스듬하게, 거의 정사각형에 가까운 햇볕이 벽을 타고 내려오는 식이다. 네다섯 칸의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볕을 따라가면서 촬영을 시작한다. 


구름에 띠라서 햇빛은 강하다가 약하다가, 사라졌다가 나타났다가를 반복했다. 그림자가 강해졌다 약해졌다 사라졌다가를 반복한다. 이상하게 빠져드는 뭔가가 있다. 사실 햇볕을 조명삼아 모델 사진을 찍은건 수년만이다. 대학원 입학을 준비하면서 야외에서 촬영했던걸 제외하면 그 이후로는 늘 실내에서 인공조명을 컨트롤하면서 한 촬영이었다. 햇빛은 내가 몰랐던 모습들을 보여주는 한편 팽팽한 긴장감을 조성한다. 좋은게 보였다면 보이는 순간 찍어야 한다. 많은게 즉흥적으로 흘러가고, 건축물 모형과 거의 대화를 하는 듯한 느낌이 들게한다. 


시간이 훌쩍 지나가버린다. 평소에는 인식하지 못하지만 태양이 실제로는 정말로 빠르게 움직인다는걸 새삼 깨닫게된다. 강당의 한쪽 벽면에 앉아서 사진을 찍다보면 채 5분 10분이 되지 않아서 자리를 옮겨야 한다. 그리고 바뀐 태양각도에 맞춰서 다시 촬영 구도를 조정해야 한다. 평소에는 신경도 쓰지않던게 오늘같은 날은 내 일거수 일투족을, 그리고 그 움직임의 속도까지 좌지우지한다는게 재밌다. 한시간 반가량이 금새 지나갔고, 햇볕은 더이상 창문을 통해 강당에 내려앉지 못할만큼 높이 올라갔다. 


그리고 나는 짐을 챙겨서 학교를 나왔다. 태양뿐만이 아니라, 태양처럼 평소에는 그 움직임을 거의 인지하지 못하는 것들역시 사실은 생각보다 훨씬 빨리 궤도를 돌고있다. 그리고 긴 대학원의 시간도 이것으로 끝이 난 것이다. 태양처럼 느리지만, 또 막상 잡으려고 생각하면 도저히 붙잡기 어려울만큼 빠르게. 하루하루가 그런것도 사실이다. 하루가 겨우 몇분 지나가는 것처럼 휘리릭 지나가버린다. 그 빠른 물살 속에서 여기저기 부딪히고, 실패하고, 패배한다. 그럴거면 도대체 왜 회사를 그만둔거냐고 내면에서 묻는 목소리가 있지만 대답하는 목소리 역시 내면에 있다. 


나는 사실 실패하고 패배하는 나를 받아들이기 위해서 나왔던것 같다. 아니 확실히 그렇다. 사실은 어디선가 이렇게 패배하고 있어야할 입장입에도 안온한 공간에 포근히 들어않은 모습이 못마땅했던 것이다. 내 진짜 얼굴은 세상에 부딪혀 실패하고 도저히 있는것 같지않은 길을 찾아서 여기저기 헤매는 그런 모습이어야만 한다고 꼴깝도 그런 꼽깝이 없을 생각을 했었던 것이다. 꼴깝임에는 틀림없지만 무를 생각은 전혀 없는 꼴값이다. 나는 이 삼년 남짓한 시간동안 온통 실패만하고 헛발질만 했지만 그게 곧 내가 하려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다시 일어날 수 있을까. 과거와 차이가 있다면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커진 것이다. 세상을 안다고 생각하는 만큼 더 두려워지는 것이다. 참 공평한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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