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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소로 Dec 25. 2023

작업환경이 작업물에 미치는 영향

크리스마스에 어울리는 일인진 몰라도 방을 청소하고 정리했다. 특히 컴퓨터 작업을 위한 기기를 새롭게 배치했다. 이렇게 단순한 형식적인 요소가 작업물 그 자체에 미치는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는게 재미있다. 단적인 일례로는 인디자인이라는 책 제작용 프로그램을 들 수 있다. 인디자인은 말하자면 키노트나 파워포인트의 훨씬 전문화된 소프트웨어라고 할 수 있다. 여러 페이지에 정보를 배치하는 책자형 컨텐츠를 아주 세세한 영영까지 컨트롤 할 수 있게 도와주는 프로그램이다. 이 제작용 프로그램에서 글과 그림을 배치하고 나서는 주로 PDF파일로 변환해 다른 사람과 공유하는게 보통이다. 재밌는건 인디자인에서 볼때는 보이지 않던 부분들이 PDF로 변환해서 훑어보면서는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는 것이다. 


작게는 오타부터 시작해서, 글자의 크기라던가, 어색한 폰트, 그리고 사진의 배치 구도까지 눈에 들어오지 않던게 확연히 들어온다. 그래서 제대로된 책자식 컨텐츠를 디자인하려면 인디자인에서만 검토할게 아니라 이렇게 PDF로 추출하는 과정을 적어도 두세번은 반복해야 한다. 물론 좀더 신중을 기하려면 실제 종이에 프린트하는 과정까지 추가하는게 좋다. 똑같은 페이지라도 인디자인에서 보는 페이지와 PDF에서 보는 페이지가 미세하게 다르듯이, 인쇄한 종이로 보는 페이지는 또 다르다. 말하자면 인디자인이나 PDF에서 보이지 않는 부분이 인쇄본에서는 드러난다. 물론 사진의 색상같은, 디지털과 아날로그 사이에 간극이 있을 수 밖에 없는 차이도 있다. 하지만 그 이외의 부분들 역시 새롭게 바라보는 시각을 갖게된다. 


모니터상에서 바라보는 페이지는 종이에 인쇄된 형태로 보는 페이지와 느낌이 많이 다르다. 화면상에서는 충분히 넓어보이는 여백도 종이위에선 좀 좁은감이 들때도 있고, 선의 굵기 역시 두 매체 사이에서 차이가 드러나는 경우가 꽤 많다. 보통 생각하기엔 컨텐츠라는 핵심적인 알맹이만 잘 만들어두면, 형식에 해당하는 매체는 크게 중요하지 않을것도 같다. 하지만 알맹이를 잘 만들어나가는데 매체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걸 깨닫게 된다. 똑같은 데이터이지만 데이터를 다루는 소프트웨어에 따라, 또 모니터 스크린에 따라, 그리고 스크린 크기에 따라, 인쇄된 종이에 따라 조금씩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게 된다. 


이제 몇개월간 지내게될 방에는 소형 빔 프로젝터도 설치해뒀다. 아마도 이 빔프로젝터를 통해 벽에 투사되는 식으로 바라보는 이미지들은 또 다른 식으로 디자인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굳이 활자의 형태를 빌려 쓸 가치가 없을만큼 당연한 얘긴지도 모르겠다. 영화를 커다란 영화관 스크린에서 보는것과, 작은 비행기 등받이 화면으로 보는게 다른건 두말할 것도 없기 때문이다. 아마도 만드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런 차이가 더 크게 느껴지는 모양이다. 소비하는 입장에서는 그저 느낌의 차이에 불과하지만, 생산하는 입장에서는 제품의 성격 자체가 바뀌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매일 쓰는 글이지만, 오늘은 평소에 앉는 까만 책상이 아닌 노란 목재 책상의 좁은쪽에 앉아서 쓰고있다. 이런 형식역시도 글의 내용에 영향을 미칠런지도 모른다. 아마 빔프로젝터로 브런치 화면을 벽에 비춰서 쓰는 글은 또 다를것이다. 항상 글의 끝맺음을 끝맺음답게 끝맺기 위해서 나름의 노력을 기울여왔었다. 하지만 오늘은 글을 쓰는 책상의 구성도 바꾼만큼 끝맺음답지 않게 끝맺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이를테면 글이 더 이어질 것 같은 시점에서 끝난다거나, 이미 끝나야 하는 지점에서 훨씬더 나아간 뒤에야 끝나는 식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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