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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소로 Dec 31. 2023

제대로 써내지 못한 건축과 그림에 대한 그럴싸한 생각

결국 그림이란 무수히 많은 선들의 집합일 뿐이다. 첫문장부터 오늘의 글은 읽는분들과의 원활한 소통은 어느정도 포기했다는 냄새가 난다. 냄새보다 더 나은 단어가 있을텐데 지금으로서는 떠올릴 수가 없다. 애초에는 연말을 맞아서 아주 오랜만에 먹은 초코빵과 치즈를 곁들인 식빵 이야기를 하려고 했지만 무위로 돌아갔다. 가만히 앉아서 생각을 하자니, 아니 생각을 하려고 한건 아니고 그저 가만히 앉아있다보니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동안 공부했던 건축의 면면들을 돌아보는 과정에서 오히려 더 분명해지는건 건축 이상의 무언가에 대한 관심이다. 


쓰고보니 첫문단은 난장판도 이런 난장판이 없다. 그 어떤 문장도 중심문장이라고 볼 수 없는 대혼돈의 멀티버스가 글 한편도 아니고 한 문단에 다 수록되어 있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결국 글이든 삶이든 어쩌다 나와버린 첫문장과 어쩌다 저지른 허튼짓을 기나긴 시간에 걸쳐 수습해나가는 과정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돌아와서, 첫문장의 그림 얘기는 그럼 왜 꺼낸걸까. 그림에 목숨을 건 사람처럼 그림을 공부할때 느꼈던 것 역시 비슷했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그림을 공부하면서도 공부하면 할수록 결국 그림 이상의 뭔가가 그림보다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었다.  


예를들어 인물화라고 하자. 대중에겐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름답기 그지없는 피카소의 서커스단 그림을 예로 들어본다. 로즈 피리어드라고 불리는, 피카소가 붉은계열 물감을 주로 사용하며 그린 아주 감각적인 인물그림들이 여기에 속한다. 이런 그림을 보면 그림은 역시 우리 주변에서 발견하는 어떤 구체적인 대상들을 화판위에 구현해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그게 상식이기도 하다. 나아가 로즈 피리어드 그림을 감상하다보면 나도 이렇게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난생 한번도 본적없는 서커스 단원들의 모습을 화판에 그려내려고 안간힘을 쓰기도 했었다. 


하지만 결국은 그런 그림을 나는 그려낼 수 없었다. 이유는 둘 중 하나일텐데, 첫번째 추측은 내 재능 부족이다. 하지만 두번째 추측에 대해서 좀더 할 말이 많다. 두번째 이유는 그런 로즈 피리어드에 등장하는 서커스 단원들의 감각적인 이미지를 구현해낼 재료같은게 나에게는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어느해 여름에 그림을 정말로 진지하게 그리기 전까지만 해도 나 역시 그림은 우리가 평상시에 보는 이미지를, 윤곽선을 따서 그리고 그 안과 밖에 그리고 때로는 안과 밖 모두에 색을 칠함으로써 구현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여름을 기준으로 그림에 대한 내 인식은 완전히 바뀌었다. 


그림은 우리가 평소에 보는 그런 '대상' '사물' '사람'들을 구현해내는 작업이 아니다. 그림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보는 형태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추상적인 선들을 하나씩 하나씩 그으면서 쌓아나가는 작업이다. 그 선은 연필선일수도 있고, 붓으로 긋는 물감으로된 선일수도 있다. 어쨌든 그림을 그릴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선을 긋는다. 물감을 뚝뚝 흘리는 드리핑 기법도 있지만, 캔버스에 물감을 때려부은다음 일부를 긁어내는 방식도 있지만 이 글에서는 선을 긋는 것으로 국한짓기로 한다. 그렇게 선을 그어나가다보면 그 축적된 선들의 집합으로부터 우리가 평소에 보는 장면들이 불쑥 보이기 시작할때가 있다. 그 지점이 재밌는 지점이다. 


보통 그런 발견의 지점은 그리는 사람과 보는사람간에 간극이 크다. 그리는 입장에서 발견한 그 이미지는 절대다수의 관객들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여기서부터가 시작이다. 그림은 그순간 작가가 발견한 그 이미지 - 본인의 눈에만 보이는 그 이미지를, 다른 모든 사람이 어느정도는 인식을 공유할 수 있는 형태로 발전시켜나가는 작업으로 설명될 수 있다. 그 작업에 대해서는 이 이상으로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하루키의 2017년작 기사단장 죽이기에 그림을 그리는 작업이 아주 절묘하게 설명되어있으니 참고하면 좋을 것이다. 


어쨌든, 그리는 사람만 보던 그 이미지가 다른 모든 타인도 '볼 수 있는' 형태로 발전되고나면 그림은 어느정도 완성됐다고 - 완성에 가까워졌다고 말할 수 있다. 말하고 보면 그림이란 참 마법같은 작업이다. 처음에는 한 사람만 착각 혹은 환상처럼 힐끗 목격한 뭔가가 나중에는 객관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식가능한 뭔가가 된다는 점에서 말이다. 하지만 보는 입장에서의 그림과 그리는 입장에서의 그림은 달라도 너무나 다르다. 그리는 입장에서 그림은 최종적으로 타인에게 인식되는 그런 이미지를 구현하는 작업과는 거리가 멀다. 적어도 내가 느끼기에는 그랬다. 이미지의 구현이라기보다는 뭐다라고 정의내릴 수 없는 몽글몽글 형태가 계속해서 변하는 것들을 무수히 반복적으로 선을 그으면서 쇠똥구리가 쇠똥을 굴려나가듯이 굴려나가는 작업이다. 


그리는 입장에서 하는 작업은 이게 누군지 뭔지 알수없는 상황에서도 그 뭔가가 될 잠재력을 가진 뭔가를 계속해서 굴려나가는 작업이다. 그러니까 피카소의 로즈 피리어드의 서커스단원 그림이라고 해서 대놓고 서커스단원을 그리는 작업은 아니라는 뜻이다. 이 문장을 쓰는순간 이 글은 망했다는 확신이 든다. 독자와의 교량은 애초에 세우지도 않았거니와 어딘가에 남아있었을 교량도 이제는 모두 철거가 완료됐다는 뉴스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그림을 정의하자면 그건 관객으로서 보는 이미지가 아니라 근본적으로는 전혀 그 의미와 무관한, 중첩된 추상적인 선들의 집합일 뿐이다. 


이제는 이 얘기를 어떤식으로든 건축으로 끌고와야 글이 일단락 될텐데 전혀 단서가 보이지 않아서 걱정이다. 그럼 건축은, 건축물은 무엇일까? 건물에서 생활하는 입장에서 보는 건물은 그냥 건물이다. '집'이고, '학교'고, '영화관'이다. 건물의 용도에 따라 무엇으로든 이름붙일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이름 붙여진 건물의 개념은 실제로 그 건물의 정체와는 대단한 관련이 없다. 건축물 그 자체는 건물 이상의 무엇인가이다. 용도가 불분명한 예술적인 조각상이라고 말하는게 어느정도 설득력은 있지만 정확히 그런얘기라고는 말할 수 없다. 나도 내가 말하려는 바를 제대로 모르기 때문에 계속해서 빙빙 둘러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건 그림을 그릴때 결국 그림이 아닌 어떤것을 다루는 작업이 중요하듯, 건축을 할때 건물 그 자체가 아닌 아직은 아무것도 아닌것들을 잘 다루는게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하려는 말을 단 한마디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확신이 든다. 뭐 좋은것에 대한 확신은 절대 들지 않지만 잘못한 것에 대해서는 이렇게 쉽게 확신이 든다는게 야속하다. 욕이 나올것만 같지만 욕까지 쓰고나면 이 글은 더 황폐해질게 분명하다. 그래도 이런 표현의 실패를 경험하는건 꽤 오랜만이다. 애초에 전달도 못할 내용은 전달하려고 하지도 말자는 체념으로 한참을 지내왔기 때문이다. 실패야 반갑다. 그래도 식사는 너와 함께하지 않는게 나을 것 같다. 이만 저녁을 먹으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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