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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소로 Jan 01. 2024

김이 빠지지 않는 맥주와 시

한해의 시작은 놀랍게도 개봉한지 3일쯤 지난 캔맥주와 함께했다. 더 놀라운건 대충 반찬뚜껑 하나 덮어놨는데도 딸깍하고 막 열어젖힌 여느 수입맥주 부럽지않은 살아있는 탄산이 찢어놓는 목넘김이었다. 그래 김빠질법한 뒤늦은 시기에 다시 열어젖힌 맥주라도 이렇게 짜릿할 수가 있는 것이다. 메리 올리버의 시 허리케인을 읽고서 뒤늦게 돋아나는 잎사귀에 감정이입을 하듯이, 묵은 맥주의 청량한 탄산에 또 감정이입을 하는건지도 모른다. 묵은 맥주는 2024년 한해의 시작과 가장 안어울리는 설정이지만, 그래서 그 누구도 그런 선택은 하지 않겠지만, 그래도 그 맥주의 신선함이 여전한지 어떤지는 결국 3일묵은 맥주를 자정을 막 넘은, 새로운 한해가 시작된지 채 한시간이 지나지 않은 이 시점에 직접 마셔봐야만 알 수 있는 것이다. 


아직 시간은 00시 몇분에 머무르고 있다. 한해를 날짜를 빼고 시간으로만 표기한다면 아마 몇일 지나지 않아 계산이 어려워 지겠지만 1298시 34분 12초쯤 되는 시기를 올 한해에도 언젠가는 통과하게 될테고, 그런 상상을 하자면 현재 00시 49분이라는 시점은 갓 태어난 신생아의 싱그러움이 가득한 시간이 분명하다. 말이 나온김에 새해기념 시나 한편 적어보기로 한다. 제목은 개봉 3일차 맥주다. 보통 지나치게 실험적인 예술 작품을 감살할때 겪는 상황중 하나는 이게 이미 시작된건지 언제 시작될건지 감을 못잡는 것이다. 예를들면 존케이지의 4분 30초였던가, 몇초였는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는다. 피아노를 앞에두고 아무런 연주도 하지않고 4분 몇소를 침묵으로 일관하는 그 연주가 있다.


혹은 관객 모독같은 연극도 마찬가지다. 갑자기 극의 세계를 깨고 원래는 없는셈 쳐야하는 관객에게 막 막을 걸어올때, 이게 연극이 계속 진행되는건지 종치고 다 끝난건지 애매해진다. 시라고 크게 다를리 없다. 예전에야 미터와 라임, 음수율과 음보율 같은 형식을 지켜가며 써야 시였지만, 이제 자유시, 산문시, 등등 형식적 제약이 무너진지 오래니까 말이다. 아무리 그래도 시같은 문장 하나정도는 있어야 시라고 우겨볼 수 있다는 생각도 들지만 새해가 새해인만큼 좀더 파격적인 마인드를 견지해보는게 좋겠다. 


한가지 진실을 토로하자면 오늘 마저 마신 맥주가 몇일된건지 정확히 모르겠다. 그래서 그냥 대충 3일이라고 쓰고 봤으나, 적어도 시가 되려면 진실된 태도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존케이지의 4분 몇초인가 하는 음악도 아닌것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자기원망이 좀 들기도 한다. 


이 맥주는 몇일이나 됐을까. 

모든게 의문 투성이다. 

진공포장된 맥주는 일단 개봉하면

급격히 탄산이 빠져나가고

금새 김빠진 맥주가 되는게 보통인데

오픈한게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나지않는 

맥주의 탄산은 어떻게 그런, 

바늘로 찌르는듯한, 

한해가 시작된 직후의,

삼일이 지나기전의 작심한 마음처럼

날카롭게 벼려진 긴장감을

가득 품을 수 있었던가. 

사실 알고보면 어젯밤에 딴 맥주가 아닐까, 

혹은 사실은 5분전에 땄는데 

내 기억이 왜곡된것은 아닐까.

맥주는 김이 빠지지 않고, 

나는 맥이 빠지지 않고, 

기억은 살아나지 않고, 

시다운 문장은 떠오르지 않고, 

행만 하나씩 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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