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 일주일은 비가 쏟아졌다. 드디어 날씨가 개었다. 햇볕이 좋아서 맨눈으로는 하늘을 보기 어려울 정도다. 썬글라스를 끼면 딱 아름다울 정도로 밝다. 오랜만에 맑은 하늘을 보자니 지금처럼 좋은 시간은 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돈은 없지만 가능성이 있는 시간 말이다. 가능성이 있는 시간은 바꿔말하면 불확실성의 시간이기도 하다. 불확실성은 대체로 회피의 대상이다. 확실성에 반하여 리스크로 규정되곤 한다. 물론 동시에 기회이기도 하다.
족히 10미터는 될 야자수 나무 꼭대기 위로 까만게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짙은 갈색에 날개가 널찍한걸 봤을때 독수리였다. 날개의 깃들이 어렴풋이 분간될만큼의 거리에서 하늘을 빙글빙글 천천히 돌고 있었다. 바람을 타고 나는지 날개짓은 하지 않으면서도 우아하게 비행하는 모습이었다. 아주 가끔씩 한두번 날개짓을 했다. 독수리가 그리는 동심원은 조금씩 이동해갔다. 더 높이, 그리고 북동쪽으로 조금씩 멀어져갔다. 날개깃이 더이상은 식별되지 않고, 점점 날개와 머리부분도 알아보기 힘들만큼 서서히 그러나 계속해서 멀어졌다.
독수리를 보는건 한국에선 흔치않은 경험이다. 한번도 본적이 없었던 것 같다. 여기서도 자주 본 것은 아니다. 그래도 오늘로 두세번째는 될 것이다. 참새나 비둘기는 여기나 거기나 다를것 없이 많다. 하지만 참새보다 조금 작은 크기에 짙은색 털, 그리고 나무 주변을 잠자리처럼 빠르게 날개를 저으며 제자리비행하는 새도 있었다. 역시 예전에는 본적이 없는 새였다. 본적없는 새라서 새로운 경우도 있지만 보던 새라도 달리 보이는 경우도 있다. 내방 창문을 통해서 보는 새의 모습은 똑같은 새라도 또 다르기 때문이다.
위아래로 여닫는 창문 밖으로는 대나무 입사귀들이 가득 보인다. 그 사이사이로 건너편 거리도 조금씩 모습이 드러난다. 아침 점심 저녁 가리지 않고 이따금씩 작은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았다가 떠나는 모습이 보이곤 한다. 그럴때는 창문 속 풍경이 말그대로 풍경처럼 아름답다. 사실 집 밖으로 나가서 보는 대나무 무리와 새들의 모습은 특별할것이 없다. 그리 울창한 것도 아니고, 색깔도 너무 짓거나 빛이 바래있으며, 다른 나무들과 뒤섞여서 주의깊에 조경이 된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길거리가 꽤나 지저분하기 때문에 미관상 매력적이기는 어렵다.
창문의 프레임은 이런 풍경에서 일부만 남기고 나머지 것들을 깔끔히 제거해놓는다. 대나무 무리의 우시부분과 갈색으로 물든 감나무 비슷한 나무의 끄트머리 몇 가지들만이 창틀 속으로 들어와 내 방 풍경의 일부가 된다. 티브이가 없는 내 방에서 이 창틀 프레임은 티브이나 마찬가지다. 혹은 장작을 때는 벽난로와도 같다. 바라보면서 생각을 텅 비우고 멍때릴 수 있는 장면이 그곳에 항상 있다. 똑같은 나무들이지만 밤낮 햇볕에 따라서, 바람에 따라서 그리고 놀러오는 새들의 움직임에 따라서 변해간다. 전체적으로 티브이 보다는 지루하지만 완전히 멈춰있지 않아서 지겹지는 않다.
밖에서 바라보는 나무들과 내방에서 바라보는 그것들이 이렇게 다를 수 있다는게 흥미롭다. 똑같은 대상이 방 안의 공간에 미치는 영향과, 바깥 길거리에 미치는 영향이 전혀 다르다는게 어찌보면 이상한 일이기도 하다. 집이라는 건축물이 그런 의미에서는 하나의 필터처럼 기능하는 셈이다. 맨눈으로 보기엔 너무 밝아서 눈이 아픈 햇볕을 썬글라스로 여과해서 딱 아름다운 정도의 밝기로 바꿔주듯이 집도 마찬가지다. 그 온전한 모습을 거리에서 봤을땐 정돈되지 않은 날것인 대나무들을 이 집은 정돈된 하나의 풍경으로 걸러준다. 그러니까 건축은 세계를 바라보는 창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자연을 바라보는 창이라고 말해도 좋겠다.
멀어져가던 짙은 갈색의 독수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새하얀 뭔가와 함께 날고 있었다. 비행기인지 새인지 정확히 알수는 없었지만 비슷한 크기였다. 그 하얀 뭔가는 독수리처럼 동그란 궤적으로 잠깐 함께 날다가 어느시점에 중심을 잡고있던 줄이 끊어진 것처럼 직선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날개짓이 없는걸 보면 새는 아니었다. 비행기라고 하기에도 좀 어색할만큼 지나치게 순백색이었다. 마치 컴퓨터로 합성한 물체가 날아가는 장면을 영상으로 보는것처럼 어색한 색상이었다. 티브에서 봅직한 가짜 UFO영상처럼 그렇게 빠르건 아니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어색한 속도의 비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