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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소로 Mar 07. 2024

태평양 표준시 아홉시 오십칠분의 글감

몇개의 글감이 지나가고 이제는 노트앱을 열어보지 않는이상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지금에 와서야 문장을 쓰기 시작한다. 비가 오지않는 엘에이 치고는 셀수없을 만큼의 빗방울이 모두다 지나가 보린 뒤에도 비는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내리고 있다. 차승원 배우님은 그렇게 말했다. 내가 짱먹은 어느 곳에서 오래 있기보다는 내가 짱먹지 못하는 곳으로 가는게 자신에게 좋다고. 유튜브에 자동으로 컨베이어 벨트처럼 윙윙윙 올라오는 영상들을 넋놓고 보지 않는데도 이렇게 이름없는 영상을 어떤 경위로 보게된건지는 모르겠다. 


짱먹지 못하는곳, 나보다 잘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한 곳에 나를 놓아두면 나는 발언권이 줄어든다, 고 차승원 배우님은 말했다. 그래서 가오가 상하기도 하고 (가오라고는 안했던것 같다) 자존심이 좀 상처입기도 한다. 아, 가오가 상하는것과 자존심에 상처입는건 동의어 반복처럼 들리지만 그렇지는 않다. 누가 이의제기도 하지 않는데 미리부터 이렇게 방패를 들고 막는건 왜인지 모르겠으나, 어쩌면 내가 궁금했던건지도 모른다. 가오가 상한다는것. 자존심에 상처를 입는다는 것. 모양이 빠진다는 것, 그래서 자신감에 얼마간의 타격을 입는다는 것. 전자는 후자의 원인이 될때가 많지만 전자가 곧 후자와 동치인 것은 아니다. 


말하자면 가오가 상하고, 모양이 빠져도 자존심에 상처입지 않을수도 있다는 것이다. 거울을 바라보자. 이제는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 미간의 주름이 친구처럼 자리잡은 한 사람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 그 사람은 요즘 느끼는바가 있다. 파이팅 넘치는, 의욕 뿜뿜하는 마인드를 품을지언정 그 뿡뿡하는 마인드가 실질적으로 발휘하는 힘의 물리적인 크기에 아쉬움이 있는 느낌. 정신을 차려보니 내가 고래를 구경하겠답시고 포경선에 승선한 느낌. 허먼 멜빌은 그렇게 썼다. 바로 그 고래, 이름은 들어봤나, 보통의 여느 거뭇한 고래와는 다른 - 다리가 후달달 후덜덜한 백색 고래가 경이로운 몸집을 자랑하며, 또 바닷물마저 베어버릴만큼 날카롭고 날랜 꼬리지느러미를 휘두르는 그 광경 - 그렇게 살아있는 자연의 에너지를 두 눈으로 보는 길은 딱 하나뿐이라고 말했다. 


자연의 경이를 직접 구경하려면 자연의 경이가 품고있는 위험 또한 감수할 각오를 해야만 한다. 그럴 수 없다면 미국의 동부 낸터컷 해변가에 밀려와 어느새 흰색 뼈만남은 고래의 사체를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한다. 본다는 것은 그렇게 복잡한 많은 것들이 개입되는 행위다. 타인의 눈동자가 정면에서 어떤 빛깔로 빛나는지 보기 위해서는, 그곳에 비친 세계는 거울에 비친 세계와는 어떻게 다른지 관찰하기 위해서는, 그 눈동자에 나 자신의 모습을 무방비로 노출시킬 각오를 해야만 한다. 스스로 벌거벗겨질 각오없이 세상의 경이를 두 눈으로 볼 수는 없다. 


차승원 배우님의 말을 빌어 변주하자면, 가오가 상하고 자존심에 크고작은 상처입고 짱짱한 발언권의 주머니가 어느정도 홀쭉해질 각오없이는 날고기는 이들이 날고기는 모습을 보기 어렵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니까 허먼 멜빌이 그 두껍고 두꺼운 두꺼비만큼 두꺼운 모비딕이라는 책 속에서 말하는 바와, 차승원 배우가 출처도 모를 어느 영상에서 말한바 사이에는 어느정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었던 것이다. 나는 아마, 새파랗게 젊었을적에 모비딕을 소리내어 읽으면서도 이렇게 후달달 후달리는 바다의 폭풍을 마주할 날이 언젠가는 찾아오리란걸 직감으로 알아차렸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느순간, 몇년도인지 알수없는 그 연말이 지나자마자 하지도 못하는 수영을 하러 수영장에 가서 하지도 못하는 수영을 수영을 할줄아는 선생님도 없이 배우기 시작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이렇게 물바다같이 물이많은 바다에서, 최민식이 어딘지도 알지 못하는 빌딩 옥상에서 눈을 뜨고나서야 그게 빌딩 옥상이라는걸 알아차렸듯이, 나역시 정신이 들고나서야 여기는 수영을 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바다라는걸 깨닫는 날이 올것임을 직감했던 것인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물속에서는 숨쉬는 법은 물 밖에서 숨쉬는 법과 완전히 다르다. 물 밖에서는 대충 호흡따위에 관심두지 않아도 그럭저럭 먹고 살아갈 수 있지만, 물 속에서는 새로운 호흡법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서는 고작 몇미터 나아가기도 벅찰 수 밖에 없다. 나아간다는 것은 곧, 사실은, 호흡한다는 뜻이다. 물이튀고, 칼날같은 지느러미가 각도없는 구역에서 날아들고 (이건 너무 오버긴 하다), 시커먼 고래 입속에 머리카락이 한번씩 스치기도 하는 그런 곳에서, 들숨과 날숨을 숨이 차지 않을 정도로, 그리고 멈춰버려 숨이 멋지 않도록 지속적으로 꾸준히 이어나가야만 나아갈 수 있다. 


나아간다. 그래서 나아가는 속도는 그다지 중요한게 아닌게 된다. 나아가는 것 그 자체에 이미 충분한 의미가 있는 그런 곳. 겁나는 것들에 겁먹은 얼굴을 주위 여기저기에 무방비 상태로 들켜야만 하는 그런 곳. 그런 겁쟁이 표정을 들키더라도 어찌됐든 나는 내갈길을 가야만 나아갈 수 있는 그런 곳. 그러나 날고기는 사람이나 동물들이 있어서 나도 어떻게든 그렇게 날지는 못하더라도 그들이 길때의 기는 모양새는 따라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비슷한 시늉이라도 하면서 배워볼 수 있는 그런 곳. 에이햅 선장과 같은 미치광이가 실제로 존재할 수도 있다는, 그런 가능성을 품은 세계. 이게 소설인지 현실인지 정확하게 분간은 하기 어려워지고만 그런 세계, 그러므로 드라마틱한 세계, 지겨운 현실로부터 드라마 속으로 여행할 필요는 없는 세계, 오히려 너무 드라마틱한 세계에 잠시 재동을 걸고 꽤나 무미건조하고 일상적인 장풍을 쏘아대는 드라마의 세계에서 잠시 쉬어가야할 그런 이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 차배우님과 허배우님은 그런 세계에 살았고 살고 있는건가. 내가 알수있는 것들은 안니다. 내가 알 수 있는건, 지금 나는 어디에 있는가. 두문단같은 한문단으로 부담스런 마무리를 앞두고 있는 이 문단속에 서있는 나에게 그런 질문을 묻는 나는 어디에 있는가. 그러한 태평양 표준시 저녁 아홉시 오십칠분의 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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