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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소로 Mar 17. 2024

거룩한 밤, 두번째 돼지국밥.

두번째 돼지국밥. 

보통 제목은 글을 다 쓴 뒤에 다시 읽어보면서 써오르는게 대부분이다. 하지만 오늘은 제목을 먼저 적었다. 시간은 참으로 돼지국밥처럼 지나간다. 돼지국밥은 참으로 시간처럼 흘러든다. 미국에서 먹는 두번째 돼지국밥이었다. 햇수를 굳이 세지 않아도 시간이 이제는 꽤나 지났다. 그런건 나중 문제다. 오늘의 글쓰기 목적은 돼지국밥 속으로 최대한 깊숙이 들어가보는 것이다. 거기에 어떤 길이 있을까. 일단 길을 찾기 시작하면 돼지국밥 뚝배기에 대고도 노크를 하는 경우가 생기는 것. 똑똑. 아니 뚝뚝. 


우선은 이름을 적는다. 장사가 잘되는 곳인만큼 이름과 총원수를 적는다. 내이름과 숫자 1을 적었다. 오늘은 운좋게도 줄이 거의 없어서 오분이 되지않아 입장했다. 메뉴판 최상단의 돼지국밥을 주문한다. 밑반찬이 나오는데 양념게장, 노란 물김치, 배추김치, 깍두기, 된장을 곁들인 양파와 피망, 그리고 한번도 젓가락을 대지않은 바다에서 끌어올린 뭔가를 양념에 절인듯한 반찬까지. 게장은 엄청나다. 양념속에 지뢰처럼 파묻힌 게껍질 때문에 조심스럽지만 그래도 두조각의 몸통을 쪽 아니 쭉 빨아서 얻는 충만함에 비할바는 못된다. 


노란 물김치는 사실 배추가 아니라 양배추 절임이다. 하지만 국물은 분명 절임이 아니라 물김치 수준이다. 하지만 그 맛에는 분명 겨자의 냄새가 짙게 배어난다. 하지만 식감은 또 물김치의 아삭함이다. 하지만 엄밀하고 엄정하게 생각해보면 그 식감은 물김치라기보다는 좀더 입자가 조밀한 양배추의 그것이 확실하다. 하지만 이 네다섯번의 역접을 만회할만큼, 아니 그만큼의 역접을 감수할만큼 그 맛에는 매력이 있다. 물김치이든 절임이든 이름이 뭐가 중요한가. 그냥 씹으면 된다. 한 드라마에서 빌려온 대사다. 


물김치만 역접의 연속을 불러오진 않는다. 이집 돼지국밥역시 한국의 돼지국밥을 떠올려보면 그만큼 혹은 그 이상의 역접을 요구한다. 일단은 소면 대신 주먹 크기만큼 되는 양의 쌀국수 덩어리가 공기밥과 함께 나온다. 왜 소면이 아니라 쌀국수일까? 하고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하지만) 생각해보면 이 질문의 기저에는 내가 간과한 좀더 근본적인 질문이 자리하고 있음을 간파하게 된다. 애초에 설렁탕이 아니라 돼지국밥인데 도대체 왜, 그게 쌀면이든 밀로 만든 소면이든, 면류가 함께 동반되느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는건 중요하지 않다. 전혀 그렇지 않다는걸 뚝배기에 이것저것 두하해 한두숫갈 뜨다보면 알게된다. 


일단은 쌀면을 투하해서 젓가락으로 휘휘 저어 풀어준다. 그리고 식사를 시작하고도 오분 뒤에야 발견한, 그러나 밑반찬 접시중 가장 중앙 가까운곳에 위치해있던 부추 비슷한 채소를 역시 뚝배기 속으로 진입시킨다. 나는 뭔가 고상을 떨고 싶었던건지 약 열가닥 정도의 채썬 부추는 진입을 막아 빈 접시에 남겨두었다. 이렇게 가느다란 것들이 뜨거운 국물에 들어가면 그 표면이 국물을 머금어서 점도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던 국물에 점도가 조금 생기기 시작한다. 그러나 죽을 떠올릴 정도의 점도와는 거리가 먹다. 그러니까 국밥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범위에 안전하게 속해있으면서 적당한 점도를 띈다. 그리고 이미 뜨거운 탕 속에 잠들어 있떤 얇은 육류들이 숟가락의 삽질에 모습을 드러낸다. 


모습을 드러낸다? 적절한 표현이다. 그러나 최적의 표현은 아니다. 그저 모습을 드러낸다고 하기엔 꽤나 상식선을 벗어난 양을 자랑하는 고기겹들이 꼭 굳게 잠긴 화생방 훈련장에서 방독면을 쓰고서 눈물 콧물을 참다가, 마침내 방독면까지 벗는 미친짓을 조교의 명령으로 억지감행한 뒤에, 도저히 이번생의 지속은 불가능하겠다는 생각 - 그런 언어적인 형태의 사고가 완전히 흔적을 감출때쯤, 그에대한 반발로서 천국의 문이 열리듯 훈련장 문이 열렸을때 그 밖으로 튀어나가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원시적인 덩어리들의 모습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돼지국밥의 돼지고기가 숟가락질에 드러나는 모습을 이렇게까지 묘사하는건 너무 과하다는 생각에 나도 동의하는바다. 그러나 나는 길을 찾고있고, 돼지국밥 뚝배기에도 노크를 할 수 밖에 없는 처지임을 알아준다면 어떨까. 


실제로도 노크를 했다. 여러번 했다. 물론 손가락으로 하지는 않았다. 숟가락 끝으로, 또 숟가락 등으로 했다. 연거푸 했다. 이제는 수심이 꽤나 얕아져서 기우제라도 지내야 하나 생각이 들때쯤에도 숟가락의 이동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삽질하듯 뚝배기의 근원을 향해서 내려갔다. 그리고 밥알과 쌀면과 돼지고기에 부딪히던 그 숟가락은 이제 그런 안전장치들이 사라진 뚝배기의 날것 표면을 향해 돌진하고 부딪혔다. 그래서 노크와 같은 숟가락질이 됐다. 평평한 뚝배기에 노크하는 것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던 것 같다. 나는뚝배기를 30도가량 꺽어서 내 숟가락의 이동방향과 좀더 직각에 가까운 방향으로 노크가 이뤄지도록, 뚝배기를 소위 꺽었다. 


나는 뚝배기를 꺽어서도 한참을 여유롭게 식사했다. 매장은 거의 만석이었고 음악은 오래된 케이팝이었고 둠칫둠칫하는 음악의 파동이 몸에 닿는듯했다. 어느것하나 내 취향인 것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스르륵 열렸다. 그곳에서 내 조여진 시간의 허리띠를 풀고 늘어진 내 시간의 뱃살을 여과없이 드러냈다. 족히 한시간은 넘게 홀로 그렇게 식사를 했다. 식사를 했다기보다 돼지국밥에 문을 두드렸다. 그에대한 답으로 국밥은 내 뱃속을 두드렸다. 배가 차는지 어쩌는지 알수없던 나의 무딘 감각도 식사가 종반을 향해가면서 이제는 더 두드리지 말아달라고 부탁하고 싶은 만큼 팽팽해졌다. 


밤은 고요하다. 식사를 마치고, 꺽인 뚝배기가 나를 마중하든 고개를 까딱하는 그 모습과, 얼음물이 왈칵 쏟아져든 컵속의 물을 화재 진압하듯 - 아니 화생방 가스를 씻어내듯 - 아니 좀더 좋은 의미로 불타는 열정의 온도를 잠시 낮추듯 마신뒤에 나는 나와서 여섯블록을 걸었다. 밤은 고요했다. 아마도 조금 까무잡잡한 학생들로 보이는 두 친구들의 꺄르르 하는 소리도 이상하게 고요했다. 돌아보면 큰길을 지나면서도 그 길을 채우고 지나는 찻소리들 역시도 고요했다. 내 청력에 문제가 생긴건가. 너무 예민해서 문제라면 문제다. 어쨌든 내가 말하는 고요와 소란은 청력의 문제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얘기다. 


시간이 고요하다. 그렇다. 고요하다고 흐르지 않는건 아니다. 또 흐르다고 모두 고요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래서 무슨 말이 하고 싶은걸까. 노크 소리가 모두 노크노크 하고 나는건 아니다. 어떤 노크는 노크라는 단어가 무색하게 어떤 소리도 내지 않는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스폰지로 된 문이기 때문일수도 있고, 문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이미지일 뿐이기 때문일 수도 있고, 노크하는 내 손가락의 속도와 동일하거나 더 빠른 속도로 내 손가락의 이동방향과 동일한 쪽으로 문이 이동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런 노크는 고요하다. 가느다란 부추 열댓가닥은 결국 어디론가 사라졌을 것이다. 역시 고요히 사라졌을 것이다. 거룩한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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