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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소로 Mar 02. 2024

스물의 두배, 그리고 치킨과 양치질 사이의 출사표

1. 옷장 맨 오른편 끝에 걸어뒀던 까만색 셔츠를 꺼내어 보이는곳에 걸어두었다. 출사표는 짧을수록 좋다는게 내 지론이다. 이 지론을 따르자면 첫문장 하나로 글을 마무리하는게 최고의 출사표를 쓰는 길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 글의 길이에 연연한다. 독자께서 첫문장 하나로 출사표를 출사표로서 읽어내기 어려울 거란 우려랄까. 그럼에도 출사표는 가벼워야 한다는 지론엔 변화가 없다. 따라서 방금 마친 저녁식사와 곧 해야할 양치질 사이에 출사표 작성 작업을 배치함으로써 내 지론을 가능한 선에서 최대한 실현시켜보기로 했다. 


2. 아직 치킨 섭취로 인한 복부 팽만이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았고, 양념반 후라이드반이 용호쌍박으로 구강기관 이곳저곳에 남겨놓은 올리브유와 튀김옷과 붉고 매운소스의 흔적들 역시 생생하다. 나의 구강기관, 아직 연기가 피어오르는 전쟁터랄까. 이 세계 속에서 화석이라고 정의되는 개체들과 시간적 좌표축의 정반대 가장 끝편에 자리잡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원래 글은 전쟁중에 쓰는것이다. 순신 장군님이 쓴 다이어리처럼. 그리고 비트겐슈타인이 논리철학논고를 실제로 전장에서, 쌍방으로 비행하는 총알 아래에서 썼듯이 말이다. 글은 전쟁중에 쓰는 것이고, 새출발은 마흔 즈음에 하는 것이다. 


3. 마흔 빼기 열은 서른 - 어느 드라마에서 말하기로 서른이란, 뭔가를 새로 시작해도 어색하지 않을 나이중엔 가장 노련하고, 뭔가를 다시 시작하기엔 애매한 나이중엔 제일 미첩한 나이다. 납득이 된다. 재미있고 재치있는 정의다. 내가 아는한 마흔에 대해서 이런 재치있는 정의가 없었던데에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이 정의의 체계를 따르자면 마흔은 뭔가를 새로 작하기엔 어색한 동시에, 또한 애매기까지하다. 재치있게 포장할 수 있는 법주를 넘어선 나이인가. 불혹 따위의 수천년 세월이 묻어나는 수식어 뿐인건가. 뭐 원래 나이에 대해서는 잘 생각하지 않는다. 생각하면 생년만 생각했지 나이는 둘째문제였고, 둘째문제는 늘 첫째문제에 가려져 보이지 않기 마련이었다. 


4. 마흔의 건축. 이정도 어감이라면 책제목으로 꽤나 그럴싸하게 들린다. 너무 당연하지 않아서, 즉 애매하고 어색한 상황이라서 어느정도 이목을 끌만한 의미의 조합이 담긴 두 어절이다. 마흔의 건축. 몰론 엄밀히 말하면 건축에 마흔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팔순의 건축이든 무엇이든 중요치 않다. 마흔이라는 수식어는 건축의 총체 중 1나노퍼센트도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건조한 시각의 반박 저편에 좀더 현실적인 시선으로도 비슷한 투의 반박을 해볼 수 있다. '마흔의 건축'이라면 마흔에 시작하는 건축에 가까운 의미가 되겠지만, 나로서는 공식적 시작이라고 말하기가 애매한 상황이다. 그러니까 마흔의 건축이라는 두 어절이 나의 상황을 정확히 전달하지는 못한다고 봐야겠다. 


5. 하지만 어떤 언어의 조합이 현상을 100퍼센트 정확하게 담아낼 수 있을까. 수사적 의문문이었다. 그러니까 언어의 태생적 한계를 지적해봤다. 그렇다 해도, 완벽한 의미전달이 애초에 불가능하다고 의미전달 자체를 포기해버린다면 또 인생 자체가 성립될 수 없을 것이다. 애초에 다다를 수 없는 완벽을 향해서 나아가는게 꽤 빈번히 발견되는 삶의 모양새들 중 하나다. '마흔에 시작을 시도하는 건축'이라고 상술하면 내가 처한 건축과의 관계를 통해 정의한 현실에 한결더 가까워 진다. 그래,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정확하진 못해도 좀더 가깝게 다가가면서. 


6. 또 조금더 살을 붙여보자. 마흔에 ,와서야, 시작을 시도하는 건축. 물론 반만 맞고 반은 틀린 어구다. 왜냐하면 ,와서야,에 담긴 나이에 대한 부정적 태도가 때로는 있다가도 때로는 없기 때문이다. 마치 요전 문장속에서 단어 상단에 붙어야할 따옴표 대신 쉼표를 따옴표인척 단어 발꿈치 아래에 배치시킨 것과 같다. 대체로 나는 내가 스무살 즈음에 그랬듯이 나이에 대해서 아무런 생각이 없다. 그럴때엔 마흔을 반타작한 스물과 다름없는 나이로 스스로를 바라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또 한편으론 숫자의 무게가 절절히, 감전되듯 전기신호를 보내오기도 한다. 아니 벌써, 라며.  


7. 마흔에 (와서야 시작을 시도하는) 건축(이라니.) 그러나 나는 자신이 있다. 그리고 이 자신감이 늦든 이르든 어느 시점에 이르러서는 산산조각 날 것도 알고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 시점에서 자신감을 갖고있는건 중요한 일이다. 산산조각난 자신감은 그것으로 끝, 하고 허무하기 그지없게 사라지는 영화관 스크린이 아니기 때문이다. 에너지 보존 법칙이 자신감의 세계에서도 작용한다. 폭발과 함께 불타고 부서지고 땅속에 쳐박히고 잿빛으로 흩날려 사라져버린 자신감은 다른 얼굴로 다시 찾아온다. 그런 얼굴들의 전신이 시작하던 순간의 자신감이라는건 알아보는건 사람 나름이지만. 


마지막 8. 일곱 문단이나 쓰고 말았다. 너무 긴 출사표다. 이쯤되면 나의 어금니들이 본격적으로 상하기 시작할지도 모르겠다. 치킨의 포격으로 발생한 화재의 불길이 아직 잡히지 않았다. 나의 어금니들을 위해서라도 출사표를 마무리하자. 내일은 토요일이지만 꺼내둔 까만 셔츠를 입고 가능한 이른 아침에 책상에 않을 것이다. 두어달 멀리하던 새벽을 다시 친구삼을 생각이다. 멀어진 친구를 불러오는데엔 연습이 필요하다. 토요일, 일요일 정도는 불러도 오지않는 친구에게도 서운한 기색 내비치지 않으리. 않으리 같은 종결어미를 아무렇지도 않게 쓰는건 나이탓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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