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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소로 Apr 02. 2024

할말, 말을 시작한 뒤에야
떠오르는 할말들.

다리가 우리하다. 우리하다는 말을 서울 사람이 쓴걸 들어본적이 없는 것으로 미루어볼때 아마도 방언일 것이다. 다리에 피로감이 상당하다는 의미다. 오늘 네시간 가량 한번도 앉지않았다. 봉사활동을 한게 얼마만인지, 기억나지 않을만큼 오래됐다. 생각해보면 그때도 나는 앉을 수 없는 일을 했다. 길거리에서 시리아 난민의 현실을 알리고 정기후원자를 모으는 일이었다. 이런저런 기억들을 쓰려고 했건만 문장을 떼고나니 내가 쓸 수밖에 없는건 하나의 응어리라는걸 알겠다. 피할 수 없는 글감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 이 응어리를 어떻게 대해야할지 모른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는 대표작인 월든에서 말했다. 시 한줄을 장식하기 위해서 꿈을 꾼게 아니라는 말이라면 내 응어리의 형태를 비춰볼 거울로 쓸만하겠다. 그렇게 보면 내 응어리는 겨우 시한줄 장식하기 위해서 꿈을 꿔대온 행태로 정의할 수 있다. 꿈을 꿈으로서 꾸는게 아니라 그럴싸한 시한줄을 쓰기 위해서 꿔온 것. 달리 비유하자면 브런치에 글한편 쓰기위해서 새로운 경험을 하는 경우도 비슷한 맥락일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사는 시대는 겨우 시한줄 장식하기 위해서 꿈을 꾸는걸 비판하기가 어려운 시대다. 유튜브 한편을 찍기 위해서 아이디어 회의를 하는 유튜버들을 모두 비판해야 하는셈이고, 좀더 넓혀보면 방송을 찍기위해서 기획을 하는 피디들 모두를 비판해야 할지도 모른다. 


물론 좀더 엄밀하게 가다듬어볼 수도 있다. 하나의 컨텐츠를 만들려는 목적을 위해서 그 목적보다는 상위에 있어야 할 가치를 지닌 뭔가를 그 아래로 끌어내리는 행위. 그러니까 소수자 혹은 약자의 고통을 악용해서 눈물을 짜내는 이야기를 하는 경우처럼 말이다. 아직도 나는 이 소재에 대해서 쓸만한 처지가 못된다. 문장의 기조를 어떻게 끌고가야할지 모르겠다. 어쩌면 시한줄 쓰는 것 이외에는 내가 꾼 꿈에 다른 어떤 고매한 목적이 있을 수 있는지 몽땅 잊어버리고 잃어버린건지도 모른다. 고매한척 하는게 금기시되는 사회 아닌가, 나는 돈이 좋다고, 광고가 좋다고, 그렇게 소탈한 혹은 소탈한척, 솔직한 혹은 솔직한듯한 고백을 하는게 오히려 사람좋은 사람이 되는 길 아닌가. 


나는 정말로 잊었다. 꿈을 꾸는데 시한줄 장식하는 것 이외에 다른 어떤 고귀한 목적이 있을 수 있는건지. 꿈을 꾼다는 것 그 자체로서 충분한 가치라는걸 어떤 감각기관으로 어떻게 감지하고 느낄 수 있었던건지. 모조리 잊은 것 같다. 기억력이 감퇴하고, 성장판이 닫히고, 까맣던 수염에 빛나는 은색이 하나둘씩 섞여가듯이, 말로 다하기 어려운 고귀한 가치에 대한 감각역시 무뎌져 가는것 아닐까. 이렇게 진지한 반성조의 글을 쓰기위해서 시작한 글이 아니었건만 이런 글을 쓰는데 그치고 말았다. 애초에는 마흔의 수습에 대한 중의적인 글을 쓰려는 생각이었다. 


마흔에 접어드는 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해야 하는지, 그리고 마흔에 시작하는 수습기간은 또 어떻게 수습해낼지, 그런 말장난같은 글을, 교보문고 한켠의 알록달록한 표지에 발랄한 폰트의 제목으로 마흔의 수습을 말할만한 글을 쓰고싶었건만. 정작 쓰고보니 쓰게된 글이란 서랍장 속에 굳게 갖혀있어야할, 호수에 빠뜨려 호수속으로 천천히 빠져들면서 번져나갈, 그래서 곧 문장은 말할것도 없고 언어의 형태도 잃게될 그런 목소리를 담고 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씨앗은 기억할만한 것이었다. 한쪽 다리를 저는 호리호리한 흑인 아주머니가 얘기한 바로 그 씨앗에 대한 이야기. 누군가는, 또 내 자아의 일부분은, 그저 말많은 흑인 하층민의 이야기일 뿐이라며 무시하기 쉬웠을 그런 류의 이야기 속에 등장한 바로 그 씨앗. 씨앗만 봐서는 절대로, 그 속에서 피어날 녹음을 믿을 수 없지만 씨앗은 그것들을 정말로 피워내기 때문이다. 정말로 아무것도 아닌 한마디가 성대의 울림을 통해 세계에 진입하는 것만으로 큰 눈덩이의 역사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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