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글쓰기와 소원해진 느낌이다. 그래서 오늘은 마음먹고 한편을 쓰기로 했다. 오랜만에 카페에 앉아 출입문을 드나드는 사람들을 한참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LA에는 문신이 일상이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그들의 팔에 새겨진 그림들에 대해 써볼까 고민했다.
문신은 메이크업과 비슷한 면이 있다. 문신은 또 이름과 비슷한 면이 있다. 문신은 또한 그래피티와 비슷한 면이 있다. 어떤 대상에 덧입혀진 비본질적 한겹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나 본질이 도대체 무엇인가? 그러나 그 이상의 진전이 없었. 아웃풋의 부재는 인풋의 부재 때문 - 그렇게 진단한 나는 16인치 맥북을 담기엔 조금 작은탓에 왼편 상단에 구멍이 나고만 네이비색 가방에서 단편소설 한권을 꺼냈다. 먼저 읽어야 쓸 수 있다. 장작을 넣어야 불이 붙는다. 문장을 떼야 문장이 타오른다. 그런 점에서 책은 좋은 뗄감이다.
이미 완독한지 한달이 넘어가는 책을 만지작거리다가 왼손 중지에 와닿는 끈적한 느낌에 책등을 살폈다. 얼룩을 보자마자 딸기쨈이라는걸 알아차렸다. 딸기의 빨간색도 없었고, 잼의 단냄새도 없었지만 기억으로 알고 있었다. 목조 주택 공사현장에 나가기 시작한 이후로 챙겨다닌 점심가방에서 새어나온 잼이었다. 아저씨처럼 티슈에 침을 뭍혀서 책등의 얼룩을 닦아냈다. 손가락 한마디도 안되는 작은 얼룩이었다. 그러나 얼굴, 아니 얼룩이 뭍었다면 얼룩을 뭍힌 근원이 있게마련. (얼룩을 얼굴로 타이핑하는 오타가 벌써 두번째다.) 가방을 열어보니 밑바닥에 손바닥 크기로 퍼진 딸기잼 얼룩이 눈에 들어왔다.
얼핏 콧등을 스쳐드는 딸기향이 느껴지는듯 했다. 밀폐용기에 식빵 네조각, 쿠키, 치즈와 함께 넣었던 잼이 왜 새어나왔을까. 전후좌우 네개의 밀폐 손잡이 중 좌우 두쪽만 잠그고 나머지 두쪽은 열린채로 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반만 잠긴 밀폐용기라는 말은, 과도기를 지나는 이들을 그려내기에도 좋은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용기 위에 절반은 정착했지만 나머지 절반은 아직 부유하는 뚜껑의 손잡이들. 반대로 용기의 입장에서 보면, 그 내용물을 절반 정도 안전하게 붙잡았지만 아직 온전히, 또 안전히 담아내지는 못한 용기들.
반만 닫힌 밀폐용기는 말하자면 기로에 서있는 존재다. 네 손잡이중 두 손잡이는 닫히고, 두손잡이는 열려있다면 그 용기는 열린걸까 닫힌걸까. 혹은, 이 용기는 열리는 중일까 닫히는 중일까. 아무래도 두번째 질문이 첫번째 질문보다는 훨씬 흥미롭게 다가온다. 이분법적으로 대상을 규정하려는 질문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러 가능성에 대해 열려있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열렸다, 닫혔다는 식의 완료된 상태가 아니라, 진행 중인 상황을 기술하기 위해서는 시간 개념이 결부될 수 밖에 없다. 지나간 과거에서 현재를 지나 미래로 이어져가는 그 시간 말이다. 지금으로서 손잡이의 절반만 닫혀있는 (혹은 절반만 열려있는) 이 용기를 이해하는데에는 세가지 방식이 있다. 첫번째는 과거를 살펴보기. 두번째는 미래를 살펴보기. 세번째는 과거와 미래 모두 살펴보기다.
먼저 과거를 살펴보자. 절반만 열려(닫혀)있기 바로 이전 시점을 돌아보는 것이다. 뚜껑이 열려진 상태로 식빵과 쨈, 치즈와 쿠키를 담은 뒤 뚜껑의 손잡이 중 두쪽만 닫았다면 이 용기는 현재 '닫히는 중'으로 볼 수 있다. 반대로 직전 시점에서 뚜껑 손잡이가 네쪽 모두 완전히 닫힌 상태였다면 이 용기는 '열리는 중'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닫히던 용기도 다시 열릴 수 있고, 열리던 용기도 다시 닫혀버릴 수 있는 세계가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다. 그래서 두번째 접근, 미래에 근거해 살펴보는 방식이 필요하다.
현재 절반만 열려있거나 혹은 닫혀있는 용기가 그 다음 시점에서 완전히 열린다면, 그렇게 빵, 잼, 치즈와 쿠키가 누군가의 입으로 들어간다면, 지금 두팔만 걸쳐진 용기는 열리는 중이라고 하는게 맞다. 반대로 딸기잼 냄새가 새어나오는걸 알아채고 덜 닫힌 두 손잡이를 마저 닫아버린다면 지금 두팔만 걸쳐져 헐겁게 닫힌 용기는 닫히는 중이라고 하는게 맞다. 이렇게 해서 과거와 미래 두가지의 관점을 살펴봤는데, 과거와 미래를 모두 살펴보는 마지막 세번째 접근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생각해보면 현재의 상황을 규정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것은 과거의 상태가 아니라 미래에 일어나는 일이다.
어제의 내가 LA 한켠에 시공중인 목조 주택의 기둥에 못질을 했다고 하자. 내일의 내가 목조 주택의 기둥 한편에 못질을 계속 한다면 오늘의 나는 집을 짓는 중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내일, 혹은 모레, 저모레, 혹은 그 이후에도 못질을 이어가지 않는다면 나의 집짓기는 어제로서 끝난 셈이다. 그러므로 오늘의 나는 집을 짓는 중이라고 할 수 없다. 글과 사이가 멀어지다보니 날카롭게 도려내 표현하지 못하고 있지만, 현재를 규정하는 것은 과거가 아닌 미래라는게 핵심이다.
과거보다 미래가 현재를 규정한다는 사실이 흥미로운 이유는 상식에 어긋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체로 누군가를 평가할 때 그가 실제로 살아낸 과거의 사실들을 기반으로 판단한다. 일어난 사실은 보통 일어날 일보다 힘이 세다. 어찌보면 그게 맞는 일이다. 사실이란 시간적으로는 모두 과거의 사건이거나 과거의 사건에 기반한 지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말로 그럴까. 단적인 예를들어, 2020년 코로나19 사태가 절정으로 치달아 연일 사망자가 넘쳐나고, 세계적으로 의료 시스템이 붕괴됐던 시절 "세상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중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세상은 정말로 끝을 향해 추락하고 있었는가. 지나고 보면 세상은 전에 없던 팬데믹 사태를 새로운 방식으로 극복하는 중이었다고 봐야할 것이다. 붕괴를 극복해낸 미래를 살고있는 시점에서 봤을때 그렇다.
모든 미래는 결국 현재를 지나쳐 과거가 되고 말지만,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에는 생각보다 많은 것들이 담겨있는게 분명하다. 개봉되기 전까지는 온전히 파악하기 어려운 것들 말이다. 같은 맥락에서 오늘의 문장이 둔중하고 날렵하지 못해서 안타깝지만 아직은 오늘을 정의할 때가 아니다. 미래의 문장이 어떻게 벼려질지, 그것들에 무엇이 담길지 아직은 다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미래야말로 밀폐용기와 같다. 미래의 뚜겅은 네방향의 손잡이가 모두 꽉꽉 닫혀있어서 잼이든, 빵이든, 쿠키든, 치즈든 그 어떤 냄새도 여간해선 새어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더더욱 열어본 뒤에야 알 수 있는 것들, 지금으로선 물음으로 보류할 수 밖에 없는 것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