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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소로 Apr 28. 2024

치즈처럼 늘어나는 예-스와
LGBTQ 아카이브 건축

"One Archives" 라는,

LGBTQ 관련 자료만을 별도로 소장한 도서관에 들렀다. 특별히 그 분야에 관심이 있는건 아니었지만, 리서치 목적의 소규모 도서관의 공간을 둘러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세명의 사서들과 나눈 이야기들은 단어하나 버릴게 없을만큼 이런저런 의미로 가득차 있었다. 돌아보면 '예스' 라는 첫 단어부터가 이미 시작이었다. 


사서데스크 가장 왼편에 앉은, 까만 안경을 쓰고 까만 셔츠에 배가 불룩 나온, 셋중에서는 가장 젊은듯한 사서는 끝을 맺지 못하는 예스로 내 질문에 답했다. 일반 대중에게도 개방되어 있느냐는 물은에 예스를 마치, 한여름날 핫브레이크를 두동강내어 당길때 가운데가 쭉 늘어나며 끊어지지 않듯이, 8등분한 뜨거운 피자 한조각을 들어올려 내 접시에 담을때 끝없이 늘어나는 치즈가락처럼,  Ye - - - - - - - 하는 답은 마지막 음절 s에 다다르지 못하고 쭈욱 늘어나고만 있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이스라엘 하마스 전쟁관련 시위로 USC 캠퍼스 전체가 임시로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한 개방정책을 멈췄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녹아내린 초코바의 허리나 뜨거운 피자치즈처럼 늘어나는 Ye-----(s)에 숨은 의미란 - 원래는 대중에게 개방된 도서관이지만 최근에 이스라엘 하마스 반전시위가 격화되어서 임시로 잠깐 대중 개방을 중지했다는 정도로 요약해 볼 수 있겠다. 그러나 나는 치즈가 늘어나다가 뚝 끊어져버리기 전에, 아 - 내가 들른 목적은 자료열람이 아니라 건축 학도로서 건물 건축을 잠깐 둘러보기 위한 것이라고 얘기했다. 나의 대답과 함께 또다른 사서한분이 등장했다. 


하얀 백발을 짧고 단정하게 정리한 그는 마이크라고 자신을 소개하며 악수를 건냈다. 라커에 가방등을 보관하고 폰이나 카메라만 휴대하는게 편하면 그렇게 하라는 안내, 그리고 USC 건축학과 학생이냐는 질문을 건냈다. USC는 아니고 사이악에서 공부했다는 대답에 마이크는 오히려 반가운 기색을 띄었다. 본인의 과거 파트너가 사이악에서 꽤 오랫동안 가르쳤고, 지금은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알게됐다. 어쨌건 이 대화를 계기로 마이크는 마치 미리 예약한 건물 투어를 시켜주는 가이드처럼 건물 구석구석으로 나를 안내해줬다. 


멋진 건물이었다. 여러가지 자료가 흰색 종이박스에 담겨 차곡차곡 선반에 정리된 자료실들을 차례로 살펴봤다. 정사각형에 가까운 평면에, 단층구조로 가장자리만 메자닌으로 둘러쳐진 단순한 구성이었지만 특별한 매력이 있었다. 도서관으로 사용하기 전에는 USC Fraternity 하우스로 사용됐었다며 각각의 방들에 남아있는 과거의 흔적들을 보여줬다. 특별한 자료들을 위해서 저온 저습으로 일정하게 유지하는 '콜드룸'에도 들렀다. 침실의 흔적, 옷방의 흔적, 화장실의 흔적 등등. 그리고 지금은 책장이 두줄로 가지런이 서있는 건물 한가운데 공간은 예전에는 난로가 있었다. 그 자리만 조금 다른 색의 타일로 덮혀있는걸 마이크의 안내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렇게 메자닌을 따라 2층 방들을 둘러보고는 1층으로 내려온 뒤 마이크는, 이 도서관 건물에 대한 오래된 기사문을 확대 스크랩한 패널을 나에게 건냈다. 1967년 레인보우라는 이름의 잡지 겨울호였다. 그러니까 57년전에 발행된 한 잡지에 이 건물의 디자인에 대한 기사가 쓰여있었다. 미 건축가 협회에서 훌륭한 건물에 수여하는 상을 받기도 한 좋은 건물이었다. Mr. Hougham이라는 건축가가 디자인하고 Rod Hansen이라는 시공사가 시공했다. 마이크는 스크랩된 기사 원문을 나에게 이메일로 보내주겠다고 했다. 


마이크가 사서 데스크 뒷편으로 이메일을 보내러 간 사이에 나는 마지막 세번째 사서분과 이야기를 나눴다. 마스크를 두겹으로 겹쳐쓰고, 역시 백발이지만 좀더 긴 머리카락을 묶어내린 할아버지였다. 그는 예전에 나처럼 이 건물의 건축을 보러온 학생들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리고 바로 근처에 있는 리차드 노이트라의 건물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줬다. 그리고 현재의 도서관으로 바뀌기 전에 클럽하우스였던 이곳이, 다시 클럽하우스로 바뀌기 전에 한 개인의 소유였던 시절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평면 한가운데의 천장으로부터 일자로 떨어져 바닥에 자리잡는 난로가 정말로 장작을 태우고 집을 덮히던 그시절의 이야기였다. 


내가 이야기의 한자락을 놓치고, 긴 백발의 3번 사서가 잠깐 배나온 검은셔츠의 1번 사서과 이야기를 나누는 틈에 나는 테라스쪽을 둘러봤다. 고양이 한마리가 문밖에서 나를 경계하며 서 있었다. 나는 테라스로 나가는 문을 열었고, 고양이는 휘리릭 조용히 도망가버렸다. 테라스쪽 정원이 아름다웠다. 듬성듬성한 잔디였지만 잘 가꿔진 잔디밭과는 또다르 정감을 주는 정원이었다. 나는 아마도 이 도서관에 다시 찾아오게 될 것 같다. 목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자료 분류작업을 위해 봉사자를 받는다. 10시부터 5시까지, 오래 머물며 보는 공간은 또 다를 것이다. 


워낙 예상치 못하게 특별하고 생생하게 다가온 경험이라 그만큼 특별한 글이 될 줄 알았다. 하지만 쓰고보니 더없이 잔잔하고 일상의 한조각에 불과한 느낌의 글이 되고 말았다. 반전시위와, 대학의 개방정책과, 지붕 한복판에 투명한 창문이 달린, 한때 개인의 주택이다가, 대학의 클럽하우스였다가, 이제는 LGBTQ 리서치를 돕는 도서관이된 공간 - 그 공간에 담기는 일상의 한 조각이다. 그게 더없이 잔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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