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후 일상
Day 24
오랜만에 먼 길을 나왔다.
퇴사를 결심하면서 첫 번째로 한 행동은 방송통신대학교(방통대)에 등록한 것이다. 이미 4년제 졸업장을 가지고 있으면서 왜 또 대학수업을 듣냐는 소리를 듣기는 했지만 뭐라도 정해진 일정과 결과가 있는 일을 해야만 시간을 알차게 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방통대는 온라인 강의가 대부분이고 대면강의도 학기 중에 1번만 나오면 되니 시간적 제약이 덜하면서도 학기 끝에는 성적이라는 뚜렷한 결과물이 나온다. 그렇게 집에서 강의를 들은 지 1달이 되었고, 오늘이 드디어 학기 중에 1번 있는 대면강의 날이다.
서울 중심부에서 멀리 이사하게 되면서 외출이라는 건 나에게는 매우 큰 이벤트다. 지난주부터 가는 루트와 소요시간을 체크해 두었고, 강의실도 미리 체크해 두었다. 강의자료도 미리 다운로드하여 패드에 저장해 두었고, 조금이라도 학생스럽고 싶어서 백팩에 소지품을 챙겨가는 시뮬레이션까지 마쳤다. 그러나 역시 인생은 예측불허하다.
에너지를 주체하지 못해 매일 저녁 춤이랍시고 흔들어대던 몸이 하필 오늘 문제가 생겼다. 정확히 말하면 어제저녁부터인데 평소보다 몸이 차갑고 춥고 심지어는 온몸을 누가 때리는 것처럼 아파왔다. 약을 먹고 잠에 들었지만 증상은 눈을 뜨고도 사라지지 않았고, 결국 오전 필라테스도 가지 못하고 계속 이불속에 누워있었다.
문제는 오늘이 학기 중에 딱 1번 있는 대면강의날이라는 점이었다. 물론 참석이 어려운 경우 대체과제로 변경할 수 있었지만 안 그래도 과목별로 제출해야 하는 과제가 가득한데 과제를 하나 더 늘리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마침 오늘 대면수업 교수님이 가장 뵙고 싶은 분이었다. 강의를 듣다 보면 여러 교수님들의 수업을 마주하는데 그중에서 인강이지만 가장 열정적으로 수업하는 것이 느껴지는 분이라 대면강의를 더욱 기대하기도 했다. 어떻게든 가야만 했다. 자기 전에 머리를 감은게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주섬주섬 옷을 입고 나왔다.
중심부에서 먼 지역으로 이사한 것의 장점 중 하나는 다시 중심부로 들어갈 때 지하철을 무조건 앉아서 갈 수 있다는 점이다. 애매한 곳에 살면 오며 가며 매번 서있어야 하는데 이곳은 확실히 먼 곳이라 여기서 출발하는 여정은 확실히 앉아서 갈 수 있다. 그렇게 온몸을 때리는 듯한 무거운 몸을 이끌고 1시간여를 갔다. 다행히 수업은 딱 맞게 도착했지만 이미 앞자리는 다른 학우분들이 자리하셔서 뒤에서 두 번째 줄 한 자리에 앉았다.
방통대의 특성은 연세가 많으신 학우분들이 많다는 점이다. 직장과 병행하기 수월한 특성이기도 하고, 이전에 하지 못하셨던 공부를 다시 하고 싶어서 도전하시는 분들도 많은 것 같다. 수업 전에 학생회와 동아리 등을 소개하는 분들이 계셨는데, 이 역시 연세가 많으신 학우 분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앞자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인터넷에 미리 올려주신 수업자료를 개인 태블릿 PC에 넣어오거나 인쇄해 오라고 안내가 있었는데, 다들 미리 준비해 오신 인쇄물들이 책상 위에 보였다. 강의 책과 노트, 그리고 필기도구가 한 세트처럼 인쇄물 옆에 놓여있었다.
이전에 다녔던 대학교 분위기와는 사뭇 달랐다.
수업에 조는 분들은 한 명도 없었다. 다들 앞에 내려진 스크린과 교수님의 입에 집중했다. 다만 수업 중간에 교수님의 질문에 대한 학우들의 답변이 남달랐다.
‘저는 이런 건 안 좋아해서요.‘ ‘봐도 잘 모르겠는데요.‘ ‘아니, 문제가 왜 이렇게 많아요.’ 등 이전 대학강의에서는 듣지 못했던 질문들이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튀어나와서 강의를 듣는 중에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악의적인 답변이나 질문이 아닌 정말 순수한 답변인 게 느껴져서 웃을 수 있었던 것 같다. 내 또래쯤 되어 보이는 교수님이 가끔은 살짝 당황하시면서도 ’ 그럴 수 있죠.’라며 모든 답변들을 다 유연하게 대처하시는 걸 보고
수업 종료 후에 이루어진 중간시험 대체 퀴즈에도 다들 진심이셨다. 시험이라서 서로 말씀하시면 안 된다고 미리 안내를 주셨지만 서로 해당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이해 안 되는 부분들을 알려주고 하면서 우리는 다 같이 시험을 보고 있었다.
답안지를 제출하러 가다가 답을 잘 못 체크한 분을 보고 틀렸다고 다른 답이라고 알려주시는 분도 계셨고, 이 답이 맞는지 봐달라며 시험 보고 있는 나에게 말을 거신 분도 계셨다. 당황스럽지만 재밌고 신선한 경험이다. 이 분들이 얼마나 학교에 진심이고 공부에 열정적이실지. 집에서 강의 듣는 모습을 보지 않아도 훤히 보이는 것 같았다.
맨 뒤에서 시험을 치르고 맨 앞으로 답안지를 제출하러 가며 다른 학우 분들의 답안지가 보였다. 다들 빼곡하게 적어가고 있는 답안지를 보며 ‘어,, 내가 너무 적게 썼나?‘ 하는 부끄러움이 느껴질 정도였다. 같은 학과 학우 분들의 열정이 나에게도 또 다른 열정을 불러일으켜준다. 배움에는 끝이 없고 나이는 제약이 되지 않는다. 나도 지금에야 이렇게 원하는 공부를 하고 있고, 하고 싶은 일을 준비하고 있다. 우리 모두 열정 가득한 대학생활이 되길 바라며,, 내일부턴 뭐든 더 열심히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