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촌동생 우성이가 놀러 왔다. 구정날 삼촌이 운영하는 회사 사옥에서 가족 모임 겸 식사 시간을 보내고 우리 집은 외할머니댁으로 향했고 삼촌네는 다른 식구들과 시간을 보내기 위해 흩어졌다.
할머니 집에서 평온한 하루를 보내고 다음날 부산으로 내려왔다. 저녁에 우성이에게서 갑작스러운 연락이 왔다.
"누나, 나 지금 부산 가고 있다." "부산? 친구들이랑 여행인 거야?" "아니. 그냥 부산 가고 싶어서 부산 가는 거야. 누나 집 갈게." "알았어. 숙모 알고 계시는 거지? 주소 보내줄게. 모르겠으면 다시 연락해." "어 알아. 누나 연락할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우성이는 자유 영혼이 되어 멋있게 자랐구나 싶기도 했고, 이 녀석 무슨 일이 있나 싶기도 했다. 저녁 11시 무렵, 다 와간다는 연락을 받고 버스 정류장으로 마중을 나갔다.
우성이는 아무런 짐도 없이 달랑 에어팟을 귀에 꽂고선 긴 팔 다리를 덜거럭 거리며 버스를 내렸다.
"누나, 나 잘 찾아왔지."
"어 그러네, 다 컸네."
집에 도착해서도 별 다른 이야기나 일은 없었다. 하루를 보낸 다음날에서도 구정 연휴에 비바람이 몰아쳐서 어디를 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고 집에서 치킨을 시켜먹고 낮잠도 자다가 저녁 무렵엔 나는 다시 키보드를 두드렸다. 밤늦은 무렵 만화책을 보겠다며 내 방에 들어와서는 그것마저도 심심했는지 내가 하는 것을 보며 여러 가지 질문을 건넸다.
"누나." "응?" "이거 혼자서 다 하는 거야?" "응. 혼자서 해야 하지." "와. 누나 혼자서 이거 하느라 고생했겠다." "아니야. 고생이라고 할 것 까지는 아니었는데 잘 몰라서 좀 그랬어." "누나 그거 하고 또 뭐 해야 해? 내가 도와줄게." "어... 그럼, 페이지만 찾아줄래? 어떻게 하는 거냐면 말이야."
할 일 없이 내가 하는 일을 궁금해하고 있길래 마침 해야 했던 일 중 하나를 부탁했다. 페이지를 찾아서 번호를 부과하고 혹시나 오탈자가 있는지 봐달라고 부탁했다. 그렇게 두 시간이 지났다.
"우성아, 그렇게까지 열심히 안 해줘도 괜찮아. 적당히 봐줘도 충분해."
밤이 꽤 늦은 시간인데도 열중하는 모습이 귀여워 사진도 찍었다. 꽤 재밌어하는 듯했다.
"거의 다 봤어. 누나, 이건 오타야 아니면 무슨 뜻이야?"
모르는 단어 질문도 하면서 이윽고, 다 끝냈다며 종이 더미를 건넸다.
우성이는 꽤 완벽하게 정리를 해냈다.
"와. 대단한데 잘하네. 덕분에 할 일이 많이 줄었어."
"누나. 근데 공부 재밌어? 공부 왜 해."
"공부? 잘 모르겠는데. 사실 잘 몰라. 음, 그냥 일을 하다가 좀 공허했거든. 나도 내가 오래도록 공부하게 될 줄은 몰랐어. 그냥 어느 순간에 공허했는데 그걸 좀 돌려 보고 싶었어. 일에 집착하는 것 같기도 했어서. 다른데 에너지르 쏟을 필요가 있겠다 싶었거든. 또 내가 입시 때에는 잘 못해내서 그게 아쉬움이 남나 싶기도 하고. 근데 다시 공부하기로 한건 도움이 되었어.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다양한 시각을 지닐 수 있게 되었거든. 당장 앞에 어떤 일이 펼쳐질지는 아직은 나도 잘 모르겠지만, 배워 나가다 보면 또 재밌는 걸 찾아 나갈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은 들어."
어느새 훌쩍 커버린 우성이는 고등학교 생활과 입시 그리고 장래에 필요한 것들에 대한 자격증 공부로 조금 버거워하는 듯했는데, 이 밤에 궁금한 게 많은 듯 옆에서 조잘조잘거려줬다. 덕분에 나는 즐거운 ASMR을 즐기면서 일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나는 입시에 성공하지 못했다. 하지만 , 승패와는 다르게 그래도 어쨌든 나름 나쁘지 않다 하는 하루를 살아내고 있다. 지나고 보면 고민했던 것들 중에서 원하는 걸 선택한 선택지로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들이 많았다. 물론 이것도 내 나름의 방어전 같은 말 일수도 있는데, 그때의 선택들을 딱히 후회하지 않는다. 아마 되돌아 가더라도 나는 결국 같은 선택을 할 테니까 말이다. 당장엔 마음이 싱숭거리겠지만 우성이가 원하는 길이 복되고 행복한 일들로 가득하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