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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RYSTAL KIM Mar 24. 2020

꿈과 힘과 선생과 벽



대한민국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학생들의 공부는 대부분 대학 입시를 초점으로 맞춰져 있다. 밝히자면 나는 입시 세계를 맛보며 처음으로 인생의 씁쓸 함을 맛 보았다. 선량한 부모님 밑에서 어째서 이렇게 욕심 많은 장녀가 태어나게 되었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나는 내가 나라는 자각이 생겼을 무렵부터 무언가가 되고 싶어서 안달이나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스스로 생각해도 모질다 할 정도로 나를 힘들게 하는 걸 즐겨했는데, 모든 시 도내에서 이루어지는 경시대회나 학교대회에 나가 수상을 하는 것이 그 당시 어린 나의 인생 목표였고, 매주 월요일 조례시간에 나가서 상장을 휩쓰는 일이 나의 일과 중 한 부분이었다. 그렇게 하면 성공한 인생의 어른이 당연히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스스로 영재가 되기 위해서 과학영재학교나 각종 디자인 대회 그리고 무조건 1등 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 속에서 오래도록 살았다. 좋은 성적을 유지했기 때문에 나는 당연히 고등학교도 특수한 고등학교에 가고 싶어졌다. 당시 외고와 자율형 사립고등학교를 갈 수 있었는데, 나 혼자 영롱하게 살겠다고 비싼 학비를 감당 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고등학교 진학 무렵엔 당시 특정 기관으로부터 많은 재정적 지원을 받을 수 있는 학교가 있어서 자율형사립고, J 고등학교로 지원을 했다.
당시 J고등학교는, 학교장추천을 받아 입학이 성적순으로 이루어졌는데 내가 입학했던 때의 커트라인은 내신 1% 대였다. (여기서 탈락 하게 되면 일반계 고등학교로 입학하게 된다. 따라서 특목고나 자사고의 입시 는 일반 학교보다 빠르게 이루어진다.) 부산시 혹은 그 외의 지역의 학생들 중에서 ‘나 공부 좀 한다’ 하는 학생들을 모두 집합시킨 형태였는데, 전교생의 인원은 단, 100명이었다. ( 나중엔 서바이벌처럼 매 학년의 10%씩의 친구들이 자퇴를 했다. )
콧대가 단단히 높은 사춘기 아이들을 선별하여 기숙생활을 감행했으니, 안에서 이루어지는 서로에 대한 시기 질투란 가히 상상초월이었다. 이야기가 정말 많은데, 그건 내가 쓰고 싶어지면 하나 둘 기록해 두도록 하겠다.
나는 현재 서른의 나이에 가까워지고 있는 나이인데, 누군가 인생에 있어서 가장 쓴맛을 보았던 때가 언제 인가요? 라고 물어온다면 단연코 고등학교시절이라고 답 할 정도다. 가장 큰 부분이 무엇이었느냐 한다면 ‘내신 관리’였다. 문과/ 이과를 합해서 3반으로 구성되어있으니, 대충 전교에서 30등정도 합니다, 하면 그건 그냥 전교 꼴지라는 말이 되었고 그러면 내신 성적은 9등급으로 찍혀 나왔다. 그리고 나는 알지 못했던 멋진 이름의 경시 대회, 그리고 방학마다 친구들이 다녀온 해외연수(?) 이야기들을 듣고 있노라면 내도록 주눅이 들고 나는 왜 그런 환경을 지원 받지 못하나 해서 화가 나기도 했다. 대학 입시 무렵엔 그게 더 심해졌는데, 부모님이 교육에 관심이 있는 친구들은 대학도 수월하게 갔다. 농어촌 특수전형을 활용해서 적당히 공부해 서울 최상위권 대학을 간 친구들이며, 추천서를 가지고 해외대학으로 눈을 돌린 친구들, 잘 짜여진 입학사정제도를 활용해 수시에 입학한 친구 등등 날아다니는 친구들이 너무 많아서, 나는 그만 의욕을 몽땅 잃었다. 아직도 고등학교 친구인 J와 회자하는, 당시 수업을 해주시던 선생님들의 명언은 과목이 이해가 어려우면 과외를 받아라, 전부 다 예습 하고 왔을 테니 설명은 패스한다같은 쿨 하지 못해 추워지는 식의 문장들이었다. 알테니 일단 패스한다는 식의 강의도 문제였지만, 일반 고등학교 수준을 넘어서는 어려운 중간고사 기말고사 문제들과 여러 가지 수업의 실기 문제들로 내가 정말 못 배운 학생이구나, 라는 생각에 자존감이 와장창 깨졌다. 그래서 나는 대학을 가고 싶은 마음도 별로 들지 않았다. 가봤자 또 이따위 경쟁이나 하겠지 싶은 생각에 마음만 고슴도치처럼 뾰족거렸다. 종국엔 어쩔 수 없이 성적에 맞춰서 대학을 한 군데 붙여놓고, 나는 조금 우회하는 방향을 택했다. 그 시절을 겪어오면서 느낀 바란 이렇다. 학생이 하는 공부지만 개인이 역량을 발휘 하기에는 혼자서의 힘으로는 어렵다는 결론 말이다. 어느 정도까지는 가능하지만, 이후로는 ‘인맥’ 이나 ‘정보’ 력으로, 기왕 같은 성적이라면 좀 더 좋은 진학을 할 수 있는 방법 부분에 있어서 개인 혼자의 힘으론 도저히 역부족이라는 말이다.
교육부에서 발표한 2019년도 11월의 자료에 따르면 대입 제도에 있어서 공정성을 강화하겠다고 발표했는데 아마도, 현재 오래도록 시행되었던 대입제도가 투명성과 공정성에 있어서 불분명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지 않을까. 지난한 시간이 흘러 교수자의 입장에선 나는 종종 생각한다. 단 한명의 학생도 소외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교육에 머무른 선생님이라면 실제하는 현실은 그렇지 못하더라도 할 수 있는한은 최선을 다하는 것이 맞다고 말이다. 가끔 내게 이야기 하는 교수님들도 계신다. 아니, 김교수 언제까지 모든 것에 그렇게 의미 부여를 할 생각입니까. 하고 말이다. 더군다나 대학은 교화를 위한 기관이 아니니, 미달은 날리는 것이 맞다고. 글쎄 이 마음이 언제까지 지속 될 지는 나도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내가 믿는 한 가지란, 나름 방황의 시절 그런 생각과 노력은 아니라고 했고 너는 이상하다고 했던 어른들 틈바구니 사이에서도 늘 너를 믿어 의심치 않는다고 외쳐 주셨던 선생님도 분명히 계셨다. 그게 얼마나 큰 힘이 되었던지. 그 힘을 겪어본 나는 안다. 가끔 수업을 할때 열정적이지만 묘하게 날이 서있는 학생이나 생각이 많은 학생 그리고 조금 소외된 학생들이 눈에 보인다. 그리고 마음이 쓰인다. 내가 받은 사랑을 그렇게 학생들에게 전달해주고 싶다. 아직은 내가 아끼는 것들을 지키기엔 내가 너무 미약하고 나약하지만 그래도 계속 노력하다보면 또 맞는 길들이 펼쳐지게 되지 않을까.
만나야 할 인연들은 꼭 만나게 되리라 믿는다. 그렇게 나는 내가 아끼고 사랑하는 것들을 마음껏 사랑하며 하루하루를 보내겠다. 가끔은 지치고 힘이야 들겠지만은, 내가 사랑하는 이들을 위한 것이라면 괜찮을 것만 같다. 그렇게 나와 관계하는 모든 이들의 길 위에 복이 깃들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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