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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지 Aug 09. 2020

내가 커피를 마시지 않는 이유  

 나를 나답게 해주는 것 




요즘은 다양한 차를 알아가는 재미에 푹 빠져있다.


최애였지만 의외의 계기로 흔적도 없이 잊혀지는 것들이 있다. 나는 커피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20대 초반에 유독 설탕, 우유도 넣지 않은 농도가 진한 겉보기에 탕약 같은 커피를 즐겨 마셨다. 그 검은 물을 마실 때 느낌은 시간이 흘러도 기억이 선명하다. 마시자마자 심장은 비포장 도로를 달리는 차 안에 있는 것처럼 격렬하게 흔들렸고, 아주 경미한 빈혈이 일어나면서 몸은 구름 위에 있는 것처럼 붕 떠 버렸다. 평소보다 이상하리만큼 말이 많아졌으며, 양을 오백 마리 넘게 세어도 끝내 잠들지 못했다. 그런데 나는 이런 내 몸의 미친 반응을 알고도 계속 커피를 즐겼다. 매일 마시진 않았지만 어떤 날엔 하루에 두세 잔을 마시기도 했다. 물론 체질상 맞지 않은 것 같으니 줄여야겠다 생각을 안 한 건 아니다. 하지만 저 "커피 못 마셔요" 보다 "저 커피 좋아해요"를 습관처럼 말하곤 했다.


나는 왜 커피를 좋아했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의 나는 어떤 특정 이미지에 상당히 매료되어 있었다. 이를테면 커피를 들고 바삐 걸어가는 할리우드 스타의 파파라치 사진, 평소 품행이 고상하던 지인이 내 앞에 앉아 에스프레소를 마시던 모습, 다른 광고에 비해 유독 고급스러워 보이는 커피 CF, 진지한 표정으로 책을 읽으며 커피를 마시던 훈남. 여기서 어떤 것이 결정적인 이유인지 잘 모르겠으나 나는 그때그때 영향을 받으며 그들처럼 커피를 내 곁에 두려고 했다. 나도 그들과 같은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 이처럼 커피는 단순한 마실거리가 아닌 멋지고, 고상하고, 지적인 아주 진지한 성인의 세계에 입문하기 위해 필요한 액세서리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런 커피의 이미지를 신봉하게 되면서 어쩌면 내가 바라는 그 이상의 멋짐을 나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자판기 커피보다 브랜드 커피를 라테류 보다는 아메리카노를 선호하며 나름의 이유 있는 허세를 부리기도 했다.


그런데 하루는 지인의 친구를 만나 대화를 나누던 중 자신이 커피를 싫어하는 이유에 대해서 듣게 되었다.


"진짜 너무 맛도 없고 밤에 잠도 못 자고 심장도 요동치고 저한테는 안 맞는 거 같더라고요. 그 맛없는 걸 사람들이 왜 마시는지 몰라요.”


갑자기 마음이 뜨끔했다. 나도 즐겨 마시긴 했지만 썩 커피가 맛있다고 느끼진 못했다. 듣고 보니 나랑 증상도 너무 비슷했다. 하지만 나는 저 사람처럼 말하기가 뭣했다. 왜냐하면 그러기엔 너무 커피를 즐겨 마시고 있었기 때문이다. 갑자기 대화에 집중하기 어려울 정도로 혼란스러워졌다. 내가 나를 속이고 있단 생각이 들었고 그런 나 자신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랐다. 


다행히도 내가 뭘 즐겨 마시는지 묻지 않아 대답할 필요가 없었다. 아마도 커피를 좋아하냐고 물었다면 “저도 그쪽처럼 증상은 비슷한데 그래도 커피가 좋아요” 이렇게 말했을까? 그런데 그런 내 답변을 상상할수록 기분은 더 이상해졌다. 마치 거짓말하지 않았지만 거짓말을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동안 줄곧 커피를 좋아한다 말해왔기 때문에 쉽사리 커피를 싫어하는 사람이 될 수 없었다. 그런데 집에 쌓여있는 일회용 드립 커피를 생각하니 실제로 “나 커피 좋아하는 거 맞는데?” 착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잠도 못 자고 속이 울렁거리고 심장은 발버둥 치는데 이건 확실히 즐거움이 아닌 고통이었다. 힘들다고 말하는 내 속의 몸부림이었다.


커피랑 맞지 않으면서 커피 애호가 행세를 했었으니 얼굴이 다 화끈거렸다. 내가 커피가 아닌 허상을 좋아했다는 사실보다 충격적이었던것은 내가 나에 대해 너무도 잘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더 이상 커피는 즐길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해명을 해야하는 개인적인 트러블이다. 나를 또 어떻게 생각할까? 하지만 커피에 대한 입장을 번복할 때는 나만 생각했다. 나를 좀 배려하고 싶었다. 늘 주문하던 커피에서 차로 메뉴를 바꾸었다. 그간 폭풍이 휘몰아치던 뱃속이 미동도 않고 고요하게 새로운 에너지를 받아들였다. 마음 안에서 좋아하고 있다는 게 느껴지는데 이 기분 꽤나 오래 유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당연히 커피를 마시지 않는다. 왜 커피가 안 맞을까 알아보다 알게 된 내 체질(소음인)과도 상극이다 보니 이제는 금기처럼 되어버렸다. 5년 전, 노르웨이 여행 중 세계 바리스타 챔피언이 운영하는 카페에서 친구들과 종류별로 나눠 마신 커피 몇 모금이 내 마지막 기억이다. (여행 중이라 그런가 맛도 괜찮았고 속도 크게 울렁거리지 않아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다.) 뭐 어쩌다 상황에 의해 마실 때가 생길진 모르겠지만 가급적 커피를 안 마시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냥 나 답고 싶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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